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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에 대한 편견을 버려

아직 만나지 못했지만, 충분히 영화적인 또 다른 왕의 캐릭터들

우리는 너무 멋진 왕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백성의 안위를 지향하며 때로는 아름다운 로맨스의 주인공인 왕은 관객의 열망일 뿐이다. 권력의 최상층부에서 수많은 견제와 싸워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비극적인 가족사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왕은 오히려 인간의 고통과 아이러니를 담을 수 있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역사소설가인 이수광 작가가 아직 영화나 드라마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은 몇몇 왕의 이면을 소개한다.

세종 임금님은 ‘뚱뚱보’

<대왕세종>의 김상경, <뿌리 깊은 나무>의 한석규와 달리 세종은 뚱뚱했다. 종합병원이라 불릴 정도로 갖가지 성인병도 앓고 있었다. 고기를 좋아했지만,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만 몰두했을 뿐 운동을 거의 하지 않은 탓이다. 책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서재에 있던 책을 모두 다 읽고 아버지인 태종의 서재에 있는 책까지 가져다 읽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주상은 몸이 비중(肥重)하시니 마땅히 때때로 나와 노니셔서 몸을 존절히 하셔야 하겠으며, 또 문과 무 어느 한쪽만 공부할 수 없으므로 나는 장차 주상과 더불어 무사(武事)를 강습하려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비중하다는 것은 뚱뚱하다는 것이고 무사를 강습한다는 것은 강제로 운동을 시키겠다는 뜻이다. 말년에는 병세가 심해져 사람이 안개처럼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시력을 잃었고, 후세의 사람들은 그가 당뇨병을 앓았을 거라 짐작했다. 후궁에 대한 탐욕이 크지는 않았지만, 자녀 수가 29명이나 된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경종 신하들의 계략이 성불능으로?

경종은 성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난 왕으로 성불능자였다. 장희빈을 그린 몇몇 TV드라마에서 그녀는 사약을 먹고 죽을 때, 어린 경종의 아랫도리를 움켜쥐고 뽑아버리려 했다. 이 때문에 경종이 성불능이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불능자인 경종의 처지에서 비롯된 상상일 뿐이다. 사실 그의 성불능에 대해 명확한 이유가 적힌 기록은 없다. 다만 당시 그를 핍박하고 협박했던 노론세력이 비밀리에 약을 먹였다는 설이 있을 뿐이다.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 치열했던 시기, 당파 싸움에 골몰하던 서인은 청나라에 가서도 이러한 경종을 비난했다. 노론은 이 과정에서 서인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세력이다. 경종은 이들의 협박을 묵묵히 견디려 했지만, 끝내 그들을 숙청하고 정권을 바꾸었다. <조선왕조실록>은 “흉당(凶黨)이 업신여겨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전혀 없었으므로 중외에서 근심하고 한탄하며 상이 질병이 있는가 염려하였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하룻밤 사이에 건단(乾斷)을 크게 휘둘러 군흉(群凶)을 물리쳐 내치고 사류(士類)를 올려 쓰니, 천둥이 울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며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하였으므로…”라고 적고 있다. 꼭 성불능 때문인 건 아니지만, 그의 아내들이 겪었던 삶도 순탄치는 않았다. 경종의 첫 번째 부인은 그가 세자였던 시절에 죽었고, 두 번째 부인인 선의왕후 어씨는 20살에 왕비가 됐지만 23살에 과부가 되고, 26살에 죽음을 맞이했다. 생전의 경종도 그런 왕후를 보는 마음이 너무나 아팠을 것이다.

영조 세상에서 가장 엄격한 아버지

경종이 죽자 노론이 지지하던 영조가 왕위에 오른다. 조선에서 자식 교육에 가장 엄격했던 왕으로, 사도세자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구 소리를 지르면서 야단을 쳤다.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반발하여 밤이면 몰래 대궐에서 나가 시정잡배들과 어울렸다. 기루에 출입하고 여승과 정을 통했다. 영조는 그럴 때마다 세자를 혹독하게 나무랐다. 그러한 일이 거듭되자 세자는 마침내 반성문을 쓰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누구의 과실이겠는가? 바로 나의 불초함이다. 이것이 누구의 과실이겠는가? 바로 나의 불초함이다.” 처음에 영조는 아들의 반성문을 읽고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문장은 아름다우나 내용이 없다는 사실에 실망한 영조는 상복을 입고 마당으로 뛰어나와 통곡하기까지 했다. 대신들은 영조가 지나치게 자식을 엄격하게 가르친다고 말했다. 사도세자는 이로 인하여 결국 정신질환이 발생하여 뒤주 속에서 갇혀 죽는데, 영조는 사도세자가 살아 있을 때 남대문 시장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 유흥비로 탕진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요즘의 아버지가 아들의 카드빚을 갚아주듯이 남대문 시장 상인을 불러 사도세자의 빚을 모두 갚아주기도 했다.

선조 “잔혹해도 귀한 내 새끼들”

조선의 임금들 중에 자식 교육에 가장 노력한 임금은 영조이고 자식 교육을 가장 못한 임금은 선조다. 선조의 아들 임해군, 신성군, 순화군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악행을 저질렀다. “순화군이 약주(藥酒)를 가지고 간 원금(元金)을 수문(水門)으로 잡아들여 무수히 구타하였고, 12일에는 약주를 가지고 간 비(婢) 주질재(注叱介)를 수문으로 잡아들여 옷을 전부 벗겨 알몸으로 결박하고 날이 샐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고 하며… 맹녀(盲女)의 위아래 이빨 각 1개, 장석시의 위아래 이빨 9개를 작은 쇠뭉치로 때려 깨고 또 집게로 잡아 빼 유혈이 얼굴에 낭자하였으며 피가 목구멍에 차 숨을 쉬지 못하였다. 무녀는 궁 안에서 즉시 치사하였고….” 하지만 선조는 아들을 두둔한 탓에 수원 백성들은 농토와 집을 버리고 달아나기까지 했다. 심지어 선조는 아들의 살인사건을 수사하던 이를 귀양보내기도 했다. 임해군이 미모의 기생을 빼앗기 위해 자객을 보내 특진관 유희서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유희서의 아들이 범인 네명을 잡아 포도청에 구금했는데, 이들을 취조한 포도대장 변양걸은 주범이 임해군이라고 지목했다. 하지만 임해군이 발뺌하자 선조는 아들의 말만 믿고 포도대장을 귀양보낸 것이다.

인조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 나의 아들 세자에게”

청나라 황실은 인조를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인 소현세자를 왕으로 올리려 했다. 이 때문에 인조는 아들에게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소현세자의 귀국을 막으려 하기도 했다. 그런데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몇달 만에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소현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인조가 아들을 독살했을 것이란 설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게다가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인 손자를 세손으로 세우지 않고 둘째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그뿐 아니라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까지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다. 아들에 대한 그의 증오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후 인조는 기행을 일삼았다. “후원에 토목 공사를 일삼아 대나무로 정자를 짓고 기둥을 조각하였는데 몹시 기묘하였다.” 아들과 며느리를 죽인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인조는 권력 때문에 아들을 죽이고, 다시 그 때문에 고통스러워한 나약한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