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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을 만든 세상에 들이대는 날카로운 칼날

김기덕 작품을 보는 고통을 감내할 만한 가치있는 영화 <피에타>

※이 글은 눈치빠른 분이라면 충분히 해독 가능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한 남자가 자신의 몸에 거대한 쇠사슬을 감는 모습이 보인다. 마치 목을 한번 감고 배로 연결한 쇠사슬이 탯줄과 연결된 태아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태아에게 생명을 주었던 탯줄의 본래 목적- 때때로 탯줄은 사내에게 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태아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과 달리 쇠사슬은 남자의 생명을 앗아간다. 그는 왜 죽었을까? 그것을 푸는 과정이 이 영화의 시작이며 끝이다. 서사가 진행될수록 그 질문은 죽어간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로 확장된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이나 죽음에 얼마만큼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에 대해 어떤 죗값을 치러야 하는가?

채무자의 신체를 훼손해서 타낸 보험금으로 그들이 빌린 돈의 열배에 해당하는 사채를 변제하도록 하는 이강도(이정진)에게 불현듯 장미선(조민수)이 찾아온다. 그녀는 “미안해. 널 버려서. 용서해줘. 이제 찾아와서”라며 자신이 강도의 어머니라고 주장한다. 그녀를 믿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그렇게 선언했고 강도는 분노하고 회의하다 자신이 가한 극한의 고통을 참아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 말을 믿기 시작한다. 미선은 강도를 따라다니며 그가 저지르는 모든 악행을 고통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여기까지는 이창동이 <>에서 풀어낸 윤리학의 김기덕식 해석처럼 보인다. 미선의 태도는 ‘내가 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비롯된 악(惡)에 대해 나는 어떻게 속죄할 것인가?’를 실천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에서 미자를 고통스럽게 했던 ‘강간을 하고도 아무런 죄의식이 없는 손주의 죄를 어떻게 대속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피에타>의 미선에 의해 ‘타인의 신체를 훼손하거나 목숨을 빼앗으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이 없는 아들의 죄를 어떻게 대속할 것인가?’로 새롭게 쓰이고 있다고 보기에 미선의 태도는 미심쩍은 면이 있다. 그녀는 강도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비난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강도를 비난하는 이들을 거침없이 공격한다. 그녀는 강도에게 자신의 부재를 용서해달라고 할 뿐 그녀의 부재가 야기했을지도 모르는 현재의 부정을 교정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선이 스스로를 ‘엄마’라고 칭하기 이전에 그녀와 강도 사이의 육체적 친연성을 본다. 채무자가 강도를 쫓아내기 위해 닫은 미닫이문에 찧고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강도의 손과 마구잡이로 들어서려는 미선을 쫓아내기 위해 강도가 닫아버린 철문에 찧고도 꿈쩍하지 않는 미선의 손. 두손은 상반된 결과로 야기된 동일한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통각이 마비된 상태이다. 초반에 이러한 설정은 강도와 미선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유전인자를 공유한 것인가라는 추측을 유도하며 육체적 동질성 혹은 혈연적 관계로 오독된다. 감독에 의해 유도된 오독이며 결말을 이해하도록 마련된 초석이기도 하다. 강도가 미선에게 쉽게 빠져드는 성급한 서사를 어느 정도 용인하게 만든다.

욕망의 부재와 상실에서 생긴 무감각

여기까지 ‘피에타’라는 제목은 강도 같은 아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극악한 어머니라는 모자상과 부정교합을 이룬다. 여기에 강도의 집 창밖으로 보이는 공장 같은 교회에 내걸린 문구 ‘할렐루야는 영원하리라’의 강박증적 요구까지 더해지면서 우리가 알고 있던 미술적 주제로서 ‘피에타’의 주인공들은 자리이동을 시작한다. 감독은 친절하게도 주인공의 이름에 그것을 각인해놓았다. 원래의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와 그를 품에 안고 애도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지만 영화 <피에타>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진 ‘강도’와 그의 거짓된 어머니일 뿐이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왜 나는 선택되었는가?’라는 질문과 싸웠다면 그 옆에 매달린 강도들은 아마도 ‘왜 나는 버림받았는가?’라는 질문과 싸웠을 것이다. <피에타>의 강도라는 캐릭터는, 그와 같은 강도의 질문을 ‘지금, 여기’로 소환하여 재현한 것으로 읽힌다. 강도는 출생과 동시에 버림받았다. 그의 말대로 강도에게는 ‘아무도 없다’. 그가 하루 종일 만나는 사람들은 그를 가장 무서워하고 증오하는 채무자들뿐이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그들의 정보를 제공받고 가서 그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손에 구멍을 뚫고 돌아와 아귀처럼 먹는다. 성욕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대상도 없이 해소된다. 그를 움직이는 조직의 보스조차 그를 경멸한다. 그의 무감각함은 욕망할 대상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혹은 너무나 오랫동안 갈구해왔지만 응답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반대로 미선의 무감각함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데서 비롯되었다.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사랑한 존재에 대한 상실감이 감각세포들을 죽여버린 것이다. 그녀는 온몸으로 상실감을 앓고 있는 중이며 그 고통은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미선 역할을 맡았던 조민수는 아마도 김기덕이 지금까지 만났던 배우 중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싶다. 김기덕 영화의 추상적 메시지들을 이토록 육체에 밀착되도록 풀어낸 배우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민수는 살아 있는 어머니와 마리아의 상징성을 절묘하게 결합하고 그 둘 사이의 간극까지 교활할 만치 정확하게 표현한다. 강도에게 온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사랑할 대상을 심어주고 동시에 그것을 박탈해야 하는 미선의 불안정한 영혼이 그녀의 눈빛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피에타>에서 가장 압권인 장면은 폐건물에서 미선이 강도를 상대로 모노드라마를 펼칠 때다. 강도가 ‘죽으면 보상금 타기가 곤란해진다’며 다리가 부러지기에 가장 적합한 높이를 찾아서 채무자를 떨어뜨렸던 바로 그 건물에서 강도는 자기가 사랑하는 유일한 대상인 미선이 누군가에 의해 죽게 되는 것을 본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물질적인 대상으로서 그것이 부재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이 이 세계 어디에나 존재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은 공기와 같은 것이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그릇되게 하고 그 그릇됨을 나무라지만 텅 빈 존재. 이 장면은 김기덕의 영화에서 늘 반복되어온 텅 빈 기표로서 팔루스의 새로운 버전을 보여준다.

엄마의 존재로 인해 깨달은 세상의 법칙

철거가 임박해온 청계천의 영세 공업사들이라는 이 영화의 배경은 텅 빈 팔루스와 조우하며 타락한 아버지의 법을 보여준다. 영세한 세입자들은 철거 때문에 작업량은 줄어들고 보상금은커녕 빚더미만 잔뜩 지고 거리로 나앉을 신세에 처해 있다. 한 채무자가 강도에게 묻는다. “자네, 청계천을 하늘에서 내려다본 적이 있나?” 애초부터 채무를 상환할 의지조차 없었던 그는 그 하늘에서 청계천으로 자신의 몸을 내리꽂는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 앞에서 돈은 힘을 잃지만 이 말은 거꾸로 생각하면 목숨을 포기하지 않는 한 돈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죽음을 목격한 강도는 돌아와 미선에게 묻는다. “돈이 뭐예요?” 미선은 대답한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그래서 집착의 대상이 생긴 강도는 그제야 돈이 군림하는 세상의 법칙이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그는 엄마가 생긴 뒤에야 세상이 무엇인지를 알기 시작했고 자기가 그 세상의 부조리함을 어떻게 실천해왔는지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는 엄마를 통해 살기 시작했고 그녀로 인해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아멘>에서 신과 같은 존재를 자신의 몸에 기입하며 여성의 몸 위에 마리아의 고통을 긍정하는 모순화법을 펼쳤던 김기덕은 <피에타>를 통해 다시 인간의 자리로 되돌아온 것 같다. 그는 강도에서 예수로 고통스럽게 변모해가는 ‘강도’의 여정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이미지의 선정성은 사운드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그 심상은 더 효과적으로 각인된다. 계속해서 ‘강도’를 생산해내는 세계의 괴물 같은 질서에 날카로운 포켓나이프를 들이대는 직설화법과 그러한 현실원칙으로부터 벗어나 날아오르는 (그러나 곧 추락하는) 초월적 사유를 동시에 보여준다. 김기덕의 작품을 보는 일은 늘 고통스럽지만 이 작품은 그 고통을 감내할 가치가 충만하다. 연출자와 출연자가 베니스영화제 수상을 두고 내건 공약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이정진의 공약이었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가장 지켜지길 바라는 건 김기덕의 공약이 되었다.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그의 다음 작품이 꼭 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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