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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노년의 손맛에 묻어난 숱한 세월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 할머니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할머니와 벨라>

<할머니와 벨라>

바야흐로 고령화 시대다. 독일 원로배우들이 총출동한 코미디영화 <수평선까지, 그리고 왼쪽으로>(Bis zum Horizont, dann links)가 7월 중순 개봉했다. 이 영화는 고령화 시대의 관객을 겨냥한 작품으로, 사회의 주류로 떠오른 노인문제를 유쾌하게 조명했다. 다른 한편에선 또 다른 방식으로 노년의 삶을 이야기하는 독립영화가 주목받고 있다. 지난 7월 말 몇몇 작은 아트하우스 영화관에서 개봉한 <할머니와 벨라>(Oma&Bella)다. 올해 베를린영화제 ‘미각 영화’ 부문에 출품되기도 한 이 다큐멘터리는 감독의 친할머니 레기나 카롤린스키(84)와 그녀의 동거녀 벨라 카츠(88)의 일상을 조명한다. 카메라는 상당 시간을 그녀들의 부엌에 머문다. 80살을 훌쩍 넘긴 불편한 몸으로는 일상생활을 헤쳐나가기도 힘겨울 것 같은데, 레기나와 벨라는 놀랍게도 어려운 요리들을 척척 해낸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정통 유대식 요리는 이 할머니들이 없으면 맛볼 수 없을 것만 같다. 밀가루를 손수 반죽하거나, 고기 부위를 손질하는 요리과정은 그야말로 의식을 치르는 양 진지하다. 그러면서도 웃음과 유머가 떠나지 않는다. 영화는 이들이 홀로코스트를 경험했다는 점을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밝고 유쾌하다. 이들의 어린 시절 음식은 옛 시절을 기억하게 하며 후손에게도 전달되는 문화다.

레기나와 벨라는 노년 생활 공동체를 꾸린 지 5년째다. 50년 동고동락한 절친한 이들은 서로에게 말벗이 되어주고, 쓰레기를 버리고, 음식을 하며 살림을 꾸리고 있다. 레기나는 폴란드, 벨라는 리투아니아 출신이지만 둘은 어린 나이에 가족과 함께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가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남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밝고 유쾌한 그들의 겉모습 이면의 아픔을 조심스럽게 보여준다. 이들은 부모님의 사진을 한장도 못 건진 시대를 살아냈다. 강제수용소 시절의 이야기도 담담하게 하지만 이들의 트라우마가 무시무시한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장면도 빼놓지 않았다. 감독이 친족인 까닭에 카메라의 시선은 매우 친밀하다. 지금은 뉴욕에 거주하는 알렉사 카롤린스키 감독은 당시 뉴욕 시각예술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하며, 졸업 작품으로 <할머니와 벨라>를 냈다.

“할머니와 벨라의 요리법을 엮은 요리책을 낼 거다”

알렉사 카롤린스키 감독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원래는 영화가 아니라 요리책을 만들려고 했다. 3년 전부터 할머니의 요리법을 엮어 요리책을 낼 생각으로 요리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할머니들 요리의 레시피는 계량하는 법 없이 눈짐작으로 하는 것이라, 그걸 잘 연구해 요리책으로 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찍다보니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거다. 인터뷰를 통해 그동안 몰랐던 할머니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당시 영화를 공부하려는 생각에 할머니 집에 갔을 때 연습 삼아 잠시 찍어두었는데, 결국 요리책보다 다큐멘터리영화가 먼저 나왔다. 내가 어릴 때부터 알던 이분들을 어떻게 보여줄까 고민했다. 이분들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일상보다 더 큰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미 세상에는 60~70편의 홀로코스트영화가 있지만, 그 영화들이 말하지 않은 다른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의 삶의 기쁨, 더불어 이 두 여자들이 얼마나 강하고 멋진지 보여주고 싶었다.

-관객의 반응은 어땠나. =베를린영화제 ‘미각 영화’ 부문에 선보였을 때 반응이 아주 좋았다. 할머니들이 길에 다니면 사람들이 알아볼 정도다. 베를린에서 유명인사가 되셨다.

-계획하고 있거나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나. =영화를 찍느라 원래 계획했던 요리책을 아직 출판하지 못했다. 지금 진행 중이고 거의 마지막 단계다. 요리책은 9월 말에 온라인으로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단편영화를 찍고 있다. 앤디 워홀의 팩토리를 찍었던 빌리 네임에 관한 영화다.

-촬영 시 특별한 점이나 어려운 점은 없었나. =원래 알던 분들이라 어떻게 객관적으로 보고, 거리를 둬야 할지 어려웠다. 그게 가장 큰 도전이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6주하고도 90분짜리 길이의 자료를 가지고 1년 동안 편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