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80년 김해 예안리 고분을 조사한 부산대박물관 발굴단의 시선은 뜨거웠다. 확인된 인골 210구 가운데 희한한 인골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부산대의대 김진정 박사팀의 분석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몇몇 인골의 머리가 인공적으로 변형된 흔적이 역력했던 것이다. 검토해보니 10구나 됐다. 연구자들은 퍼뜩 <삼국지> ‘위서·동이전·변진조’를 떠올렸다.”(‘성형에 빠진 동이족, 죽음을 무릅쓰고’,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2012년 8월15일자)
가야의 편두 풍습
연구자들이 떠올렸다는 <삼국지> ‘위서·동이전·변진조’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누른다. 머리를 모나게 하려는 것이다(兒生 便以石厭其頭 欲其). 지금 진한 사람은 모두 편두다(今辰韓人皆頭). 왜와 가깝다보니 남녀가 문신도 한다(男女近倭 亦文身).” 이렇게 역사적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가야의 풍습이 발굴된 유골을 통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순간에 온몸에 전율이 흐르지 않을까?
편두의 풍습이 신라에도 있었다는 설이 있다. 가령 ‘지증대사탑비’에 새겨진 최치원의 비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법흥왕이 만년에 출가하여 스님이 된 것을 설명하는 대목이란다. “가이성참석종(加以姓參釋種) 편두거매금지존(遍頭居寐錦至尊) 어습범음(語襲梵音) 탄설족다라지자(彈舌足多羅之字).” 옮기면 “게다가 성마다 석가의 종족에 참여해 편두인 국왕이 삭발을 했으며, 언어가 범어(梵語)를 답습해 혀를 굴리면 불경의 글자가 되었다.”
과학 저술가 이종호는 여기서 독특한 결론으로 비약한다. 즉 ‘신라 왕관은 부장용이라서가 아니라 왕들이 실제로 편두였기 때문에 작았다.’ 하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遍頭居寐錦至尊’에서 ‘편두인 국왕이 삭발을 했다’는 해석은 나오지 않는다. 어느 블로거(정형진)는 지증대사탑비의 ‘편두’(遍頭)는 동이전의 ‘편두’(偏)와는 한자가 다르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편두’가 아니라 ‘삭발’을 뜻한단다. 결국 ‘신라 임금 편두설’은 오역이 빚은 해프닝인 셈이다.
인공적 두개골 변형
‘인공적 두개골 변형’(artificial cranial deformation)은 가야만의 습속이 아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편두는 동이족 문화의 보편적 특성이었다. 동아시아만의 습속도 아니다. 편두의 관습은 아시아는 물론이고 이집트 문화와 북아메리카의 인디언, 남아메리카의 마야문명 등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발견된다. 가끔 ‘외계인 해골(?)’이라는 다소 멍청한 제목으로 올라오는 기사 속의 마야 두개골은 대부분 이 편두(elongated skull)의 예일 뿐이다.
이제까지 발견된 편두의 최초의 예는 이라크의 샤니다르 동굴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무려 BC 45000년)이다. 결국 편두의 역사는 구석기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서양에서 편두에 관한 최초의 문헌상 기록은 히포크라테스의 것이다. 그는 흑해 연안에 살았던 마크로세팔리(macrocephali), 즉 대두족(macro=크다+kephale=머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그 나라의 관습이 이 적응의 원인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관습은 이후에 본성이 된다. 커다란 머리를 가진 자들이 귀족적으로 여겨졌다. 그 때문에 대두족은 아직 말랑말랑한 아이들의 머리를 손으로 눌렀고, 붕대나 그 밖의 수단으로 강제로 머리의 길이를 늘렸다. 이 인공적 절차가 종국적으로 이 나라 사람들의 머리가 커지는 요인이 되었고, 결국 그런 목적에 더이상 인공적인 수단은 필요하지 않게 되기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획득형질도 유전이 된다는 얘기다. 흥미롭게도 아리스토텔레스도 히포크라테스를 거든다.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내적 속성만이 아니라, 순전히 우연적인 외적 표징까지 물려받는 것은 충분히 개연적이다.” 하지만 히포크라테스가 획득형질이 영원히 유전된다고 보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머리는 더이상 완전히 그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위에서 말한 인공적 변형의 수단을 전적으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인공적 두개골 변형’의 발상은 원래 우연한 두개골 변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뼈가 무른 유아들은 잠을 자는 습관에 따라 자연적으로 두개골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 고대인들은 이를 보고 두개골을 ‘인위적으로’ 변형시킨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우연적으로 변형된 두개골이 고대인들에게 매우 깊은 시각적 인상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니 인위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두개골의 변형을 재현하려 한 게 아니겠는가.
두개골 변형의 관습에는 어떤 사회적 표상이 결합되었을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도 편두가 “귀족적으로 여겨졌다”고 지적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편두에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머리를 강하게 압박하면, 그 부위의 뼈가 얇아져 쉽게 부서진다고 한다. 따라서 편두를 만들려다가 아이가 생명을 잃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시점에선가 편두의 관습이 사라진 것은 그와 관련이 있을 거다. 마크로세팔리족 역시 이미 당시에 편두의 관습을 포기했다지 않은가.
사실 편두를 처음 접한 것은 베를린의 이집트 박물관에서였다. 거기서 본 이집트의 왕과 왕비의 초상조각은 하나같이 두상이 기형적으로 길어져 있었다. 이게 장인의 주관적 ‘표현’일까? 아니면 대상의 객관적 ‘묘사’일까? 이집트의 초상조각은 매우 자연주의적이다. 그런데 조각상의 두상이 길어져 있다면, 그것은 실제로 그들의 두상이 그랬음을 의미할 거다. 그다음에 당장 떠오른 물음은 이런 것이다. “대체 왜 그랬을까?”
편두의 목적
편두의 관습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가장 보편적인 가설에 따르면 ‘소속감(affiliation)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결국 다른 종족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한 표식(mark)이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같은 종족 내에서도 편두를 하는 부류와 안 하는 부류로 나뉘는 사회도 많았다. 이 경우 편두는 종족 내에서 사회적 신분(social status)의 상징으로 사용됐을 것이다. 한마디로 편두는 (종족의 안팎으로) ‘구별 짓기’ 위한 기호행동이었다는 얘기다.
‘구별 짓기’란 결국 우월함의 과시를 의미한다. 그것은 ‘지적’ 우월성일 수도 있고, ‘영적’ 우월성일 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미적’ 우월성일 수도 있다. 가령 바누아투 공화국의 말라쿨라 섬에서는 편두를 가진 사람이 지적으로 뛰어나고, 영적 세계에 더 가까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단다. 물론 지적, 영적으로 우월한 자는 사회적 신분도 우월할 것이며, 미적으로도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미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의 표상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안리 고분의 편두 인골은 임신의 흔적이 없는 (평민) 여인들의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왜 편두를 했을까? ‘명품 코 박사’로 알려진 어느 성형의의 말이다. “편두를 하면 코가 솟아 현대인이 추구하는 성형미용의 효과는 있는 게 분명하다. 예전처럼 편두를 한다면 입매가 교정되는 명품코 성형, 돌출입코가 교정되는 명품 성형, 입매 교정과 무턱 성형, 주걱턱이 바로잡히는 명품코 성형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시대착오가 있다. 실제로 그런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과연 가야시대에도 솟은 코가 미의 이상이었을지는 적이 의심스럽다. 현대의 미용성형이 추구하는 미의 이상은 어디까지나 서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