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제부터 그들은 신체를 둘러싼 겉치장이 갖는 의미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좀 이상하긴 하지만 김기덕이 신체를 불결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살코기 사이로 끼어드는 온갖 제도적인 장식들 때문이다. 그 장식들이 들러붙어서 살코기를 자꾸만 그 어떤 다른 것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짐승이라는 은유적 대상과 (항상 그 어떤 사회제도적 자리매김을 당한 채 여기로 불려온) 여자라는 환유적 대상 사이에서 서로 뒤엉켜 붙어버린 신체라는 영토를 사이에 둔 이 기괴한 연극은 보는 우리에게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이 영토를 사이에 둔 둘 사이의 관계가 제도적 투쟁이나 비대칭의 계약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모두들 사랑을 믿는 척하면서 그것을 경멸하는 동안(누구보다도 홍상수, 그리고 자꾸만 그뒤를 뒤쫓으려는 허진호) 이 신기한 시대착오주의자 김기덕은 그걸 정말 믿는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나는 사랑보다 더 허기진 욕망을 알지 못한다. 그건 아무리 채워넣어도 항상 비어 있는 불안이다. 그걸 채워넣기 위하여 김기덕은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꾸만 제도의 장식들이 그들 사이로 끼어들고, 살코기 사이로 파고든다. 남은 방법은 둘 중의 하나이다. 그 하나는 나르시시즘에 빠져들어 세상에 대해, 심지어 상대에 대해 서로 눈멀어버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진정한 사랑에 이르는 것을 계속해서 미루는 것이다. 김기덕은 후자를 선택한다. 여자들이 짐승의 그 끈질긴 구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대답을 미루다가 이제 비로소 그 사랑을 바라게 될 때 정반대로 짐승들은 슬프게도 그 대답을 미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순간 그들은 무대에서 내려와서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불현듯 이제까지 모습을 감추었던 세상이 드러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헛고생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방식이다.
김기덕은 왜 자꾸 숙명을 끌어들이는가?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일관되게 일상 삶의 부재라는 측면이 그의 영화에서의 허구성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김기덕의 영화를 공격하는 사람들은(때로는 옹호하려는 사람들마저) 부재하는 낙원을 생산하고, 거기에 스스로 빠져들면서 히스테리라는 방어를 통하여 나르시시즘을 무한정 지탱시키려고 한다. 그것은 김기덕이 원치 않는 일이다. 우리는 정말로 김기덕이 만들어내는 인공적인 무대 위에서 인위적인 연극성에 몰두하는 주인공들이 그 자신에게 강요된 선택이라는 믿음 때문에 매우 억울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돌아보아야 한다. 이상한 숨바꼭질. 그래서 김기덕은 그 주인공들을 구해내기 위하여 어쩔 줄을 모르면서, 때로는 유치한 방법으로(<야생동물보호구역>과 <실제상황>), 또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반추상의 표현으로(<파란 대문>과 <섬>), 가끔은 상징적 자살의 몸짓으로(<악어>), 하지만 결국은 동어반복으로(<수취인불명>과 <나쁜 남자>) 죄의식에 사로잡혀 막판에 이른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언가 선택을 해야 한다. 선택을 한다는 것은 죄의식으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우리에게 죄의식 안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양자택일. 그러나 그 선택의 대구가 그를 홍상수와 갈라서게 만든다. 대부분 사람들은 윤리적인 것을 선택하기를 종용한다. 그러나 홍상수는 윤리적인 선택 대신 미학적인 선택을 한다.
내게서 가장 이상하게 보이는 점. 이제까지 김기덕의 선택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나쁜 남자>를 보고 난 다음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또는 사람들이 그를 오해한 것이다. 김기덕은 왜 자꾸 숙명을 끌어들이는가? 그가 숙명에 사로잡히면서 점점 더 인간의 행위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행위는 신의 제스처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기괴한 가정, 그가 마침내 신에게 굴복한다면. 그는 정말로 윤리적인 선택 대신 종교적인 선택을 한다. 이건 과장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쁜 남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기어이 아주 오랜 시간 찬송가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를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한번 들어보라. ‘나쁜 남자’ 한기와 ‘창녀가 된 여대생’ 선화를 떠올려보면서.
…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슬픔 없네, 두려움 없네,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그는 (어쩌면) 약속을 믿는다. 그래서 언젠가 자기의 주인공들이 무대에서 내려갈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 그 고통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어는 세상이 그들을 무너뜨리기 전에 스스로 형벌을 가하는 것이다. 그 형벌이란 항상 사랑이다. 그들의 놀이는 점점 더 연극성을 띠어갈 것이며, 그 안에서 점점 더 히스테리가 심해져갈 것이다. 그래서 그 주인공들이 서로 상대의 몸 안으로 리비도를 흐르게 하려고 미숙하게 몸부림치는 동안, 자신의 낙원을 위협받은 구경꾼들은 점점 더 무대 위의 주인공들에게 자기의 불안 때문에 발작을 일으킬 것이다. 김기덕은 자승자박을 당한 것이다.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말. 그러니 당신의 죄의식을 즐겨라.
갑자기 마지막 문장을 쓰고 든 생각; 김기덕이 정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가 이제는 질린 나머지 인터뷰는 더이상 안 하겠다고 선언한 기사를 읽었다. 만일 허심탄회하게 내가 그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한다면 그는 받아들여줄까? 정말 악랄하게, 야비하게, 못된 생각으로, 꼼꼼하게 준비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그의 영화에 대해서 즐겁게 이야기해보고 싶어졌다. 가끔은 그 자신도 악어에게 물리는 경험을 해보아야 한다. 나쁜 영화비평가로부터. 정성일/ 영화평론가▶ 讚 김기덕 反 II 정성일이 말하는 김기덕 (1) ▶ 讚 김기덕 反 II 심영섭이 말하는 김기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