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에 시간 날 때마다 ‘오늘의 요리’를 올렸더니 사람들 반응이 제각각이다. 변영주 감독을 비롯한 영화계 인간들은 이제 하다하다 안되니 요리 사진을 미끼로 던져 연애질을 하려는 솔로의 마지막 몸부림 아니냐며 가자미눈으로 힐난을 일삼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본업이 요리고 부업이 영화냐며 비웃기조차 한다.
억울한 건 아닌데, 뭔가 그들의 질투를 달래줘야 할 것 같아 이 지면을 빌려 오늘의 요리에 얽힌 사연을 조금 남겨놓을까 한다.
난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어렸을 적 엄마한테 깜빡 속아 소고기인 줄 알고 한입 먹었다가 토한 이후로, 한번도 입에 대지 않았다. 물론 브리지트 바르도처럼 개고기를 먹는 사람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나에게 지구를 걸어다니는 포유동물들은 모두 평등할 뿐이고, 특정 동물에 대한 특권적 애호를 주장하는 건 논리적 모순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영화 <파니 핑크>에서 “눈 달린 동물은 먹지 않았다”는 문장을 나중에 비문으로 쓰겠다는 주인공 파니처럼, 가급적이면 ‘발 달린 동물은 먹지 않는다’는 소신을 실천하고 싶어 하는 소심한 페스코 채식주의자랄까.
집안 내력인 고혈압 때문에 육류보다 채소를 씹어야 하는 나이가 오기도 했고, 단백질 과잉 시대에 굳이 공장에서 대량 사육되는 동물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육류를 일용할 식량으로 삼아야 할 이유도 잘 모르겠기에, 단백질은 콩과 생선에서 얻고, 밥상엔 주로 푸성귀를 올려놓는다. 영화 작업할 때 스탭들 때문에 어쩌다 고기를 몇점 먹어야 하는 상황이 있긴 하지만, 일상에선 대부분 풀을 뜯어먹고 산다.
그렇다고 육류 위주의 식당을 피하기 위해서 집에서 요리를 하는 건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내 입속으로 들어가는 먹거리와 내 몸과의 직접적 관계를 알기 위한 일상의 실천이랄까. 밥상이 곧 하늘이라는 거창한 생태주의 철학까지 갈 필요도 없겠다. 그저 인간의 삶에서 자주성을 박탈하는 이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입속으로 들어오는 먹거리에 대해 알고, 내가 먹는 음식만큼은 내가 직접 요리하고픈 소박한 욕심 때문이다.
예컨대, 오늘 저녁에 땀 뻘뻘 흘리며 조려낸 쌉싸름하고 달짝지근한 우엉조림은 철분이 많아 빈혈 있는 사람들에게 좋다는 걸 이해하는 과정을 즐기기 위해 요리를 하는 것이다. 먹거리를 이해하다 보면 공장에서 눈물 껌벅이며 죽어간 동물들을 가급적 먹지 못하게 되고, 산에서 채취한 나물의 성긴 뿌리도 귀히 물에 씻어내고 그 나물들의 고유한 향취를 감각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우습겠지만, 당신이 먹는 걸 느끼고 이해하는 과정이 생략된 삶이란 얼마나 파편적인가. 요리할 시간을 주지 않는 톱니바퀴 같은 노동사회란 얼마나 비정한 사회인가.
그게 내가 꿋꿋이 ‘오늘의 요리’를 하는 이유다. 아마 파뿌리 같은 머리의 늙은 할아버지가 돼도 직접 요리를 할 것이다. 그리고 먹거리에 대해 더 알게 되면 푸성귀 냄새 가득한 요리책도 낼 생각이다. 뭐, 변영주 감독 바람대로 요리 덕분에 애인이 생기면 더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