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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철가방과 포니 블루스2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여대생 오너드라이버

1980년의 일이었다. 사건은 아주 사소한 실수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신촌의 학교에서 방배동의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다. 하지만 전날 이태원의 나이트클럽에서 밤을 지새운 탓인지, 의자에 앉자마자 졸기 시작했다. 기사 아저씨가 내 어깨를 흔들어 깨웠을 때는 이미 방배동을 지나쳐 종점에 당도한 뒤였다. 그곳은 내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동네였다. 몇대의 버스들이 도열한 주차장을 둘러싸고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들이 펼쳐져 있었고, 동네 뒷산으로는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길가에 나와서 노닥거리던 동네 청년 한 무리가 나를 뚫어져라 훑어보고 있었다. 단아한 물방울무늬의 원피스 차림이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너무 민감한 반응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무서웠고 수치심을 느꼈다.

어렵게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돌아온 뒤, 나는 오너드라이버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만 해도 멀쩡한 집안의 아가씨가 자가용을 운전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다시는 원치 않은 곳에 발을 내딛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아빠를 한달 넘게 졸랐고, 아빠는 여러 조건을 내걸고선 못 이기는 척 외동딸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그 조건 중 하나는 대학생이라는 내 신분 때문에 외제차만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국산차 중 가장 귀엽게 생긴 ‘포니’를 선택했다.

그런데 막상 차를 몰고 시내에 나서자,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옆 차선의 택시 운전사들이 창을 내리고 내게 쌍욕을 해대곤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 그악스러운 반응이 이동의 편이성을 독점하려는 남자들의 편협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초보 딱지를 떼고 난 뒤 생각이 달라졌다. 자동차가 교통수단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노리개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핸들을 잡고 가속 페달을 누를 때 몸과 마음이 자동차와 혼연일체가 되었을 때의 쾌감. 자동차는 도시 한복판에서 그 쾌감을 제공해주는 기계 장치였다. 남성 운전자들은 젊은 여자와 그 쾌감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냥 못 견디게 싫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남성 운전자들을 흥미롭게 관찰하면서, 통제의 대상을 자동차에서 내 또래 남성들로 확대해보기로 했다. 첫 번째 실험 대상은 폴크스바겐 비틀을 몰며 겉멋 부리던 남학생이었다. 머리도 좋지 않고 자존감도 높지 않은 게 실험 대상으로서 딱이었다. 하지만 하룻밤 함께 지냈다고 내 주인 행세를 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그만 만나자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옆 동네 중국집 배달원 덕배를 만난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나를 계속 쫓아다니던 그 머저리의 폴크스바겐과 동네 비포장 골목길에서 추격전을 벌이던 날, 나는 철가방을 들고 걸어가던 덕배를 칠 뻔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다행히도 덕배는 땅바닥에 쓰러졌다가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러고선 내게 다가와 음식 값을 변상하라고 따졌다. 후줄근한 남색 추리닝, 억센 골격의 옆얼굴, 어눌하게 더듬는 사투리 말투. 얼핏 봐도 어릴 적 시골 외갓집에서 보았던 양순한 잡종 개 같았다. 나는 바로 이 사람이 내가 찾고 있던 남자라는 걸 알아챘고 곧바로 실험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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