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에서 공부했던 언어는 한때 전세계에 수많은 식민지를 갖고 있었던 나라의 것이었다. 식민지 대부분은 아프리카에 있어서, 외무고시에 붙어도, 대기업에 들어가도, 중소기업에 들어가도 그 언어로 뭔가 해보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곧잘 아프리카로 가곤 했다. 제대로 졸업을 하지도 않았거니와 대학 시절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좋은 게 얼마 없었던 나는 그때 선후배니 동기들과 연락을 거의 하지 않고 살았다. 삼십대가 되어서야 나는 옛 모범생들이 그 언어를 쓰건 안 쓰건, 정말로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흑인 유모와 기사와 가정부를 둔 가발공장의 공장장으로, 혹은 그렇게 소원해 마지않던 삼성이니 현대니 하는 대기업에 들어가 이집트니 리비아니(“이집트에서 ‘난리’가 나서 아내와 아이를 서울로 보내고 리비아로 피신했는데, 리비아 뉴스 봤지? 이렇다니까”) 하는 곳의 주재원으로 살고 있음을 알았다. 친하지도 않으면서 종종 입에 올리는 그들의 그런 이야기.
김애란의 <비행운>을 읽다가, 다른 동창들에 생각이 미쳤다. 예를 들면 20살 때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몸이 안 좋아 고등학교를 1년 ‘꿇은’ 친구가 졸업하고 주유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같이 일을 시작한 아이가 못하겠다고 그만둬서 입장이 난처하다고, 그래서 한달만 일해달라고 부탁해서였다. 그 주유소에는 중학생부터 스물몇살까지의 아이들이 나처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법으로 정해진 시급을 제대로 받은 건 대학생인 나 하나뿐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기름을 가득 넣은 손님이 친구가 ‘깜빡’한 틈을 타 5만원을 내지 않고 가버린 날 친구는 고등학교 내내 그랬듯 발작을 일으켰고, 나는 그 친구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괜찮아”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한달 뒤에 그곳을 떠났지만 친구는 남았고, 나이가 10살 많고 키는 자기보다 한뼘이 작은, 운전면허 필기시험에서 수없이 떨어진 주유소 오빠와 결혼해 21살에 첫아이를 낳았다.
<비행운>을 단숨에 읽어내려가면서 서울이라는 도시의 사계가 한순간에 몸을 스쳤고, IMF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같은 것과 무관하게 꾸준히, 더 나을 줄 알았던 과거의 미래를 도시의 뒷골목에서 참담한 현재로 살고 있는 나와 내 친구들 때문에 더위를 잠시 잊었다. 철거되는 아파트에 남은 최후의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일의 선뜩함을 내가 경험으로 알고 있다는 데 공포에 질렸고, 뉴스에 거마대학생이라고 싸잡아 통칭되는 그 아이들의 발버둥에 두려워졌고, 지치고 지치도록 기다려도 행복이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무지 아무것도 그만두지 못하는 이 모든 일에 뒷목이 저릿했다. 김애란은 그 누구보다 우리 시대의 작가가 되었구나. 창문처럼 보이는 벽으로 가득한 이 도시에서, 잊고 싶었던 이들의 환영을 발견한다. <비행운>을 읽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 웃지도 울지도 못할 당신과 나의 진짜 대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