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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것
장영엽 2012-07-31

<다크 나이트 라이즈> 어떻게 볼 것인가

“이 평화가 영원할 것 같아요? 곧, 폭풍이 몰려올 거예요. 미스터 웨인.” 고담시의 화려한 자선파티장에서 ‘캣우먼’ 셀리나 카일(앤 해서웨이)은 브루스 웨인(크리스천 베일)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인다. 곧,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개봉을 손꼽아 기다리는 한국 관객에게 캣우먼의 이 대사는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본격적인 여름 성수기에 접어든 한국 극장가가 어둠의 기사를 맞이하며 크게 동요하고 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개봉을 하루 앞둔 7월18일,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이 영화의 사전예매율은 84.4%를 기록했다. 점유율로 따지면 역대 국내에서 개봉한 슈퍼히어로영화 중 1위다. 아이맥스 상영관의 금싸라기 좌석을 예매하려면 8월 중순을 넘봐야 할 지경이다. 북미 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2D로 개봉한 역대 영화 중 최고의 오프닝 성적을 기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배트맨의 상륙으로 인해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 극장가의 평화는 이미 깨졌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이 폭풍이 어느 정도의 위력으로 몰아닥칠지를 지켜보는 일뿐이다.

배트맨은 더이상 컬트적 영웅이 아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무엇 때문에 우리는 어둠의 기사가 유발한 이 폭풍에 기꺼이 휩쓸리길 원하는 걸까.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를 잇는 ‘<배트맨> 3부작’의 마지막 영화라서? 시리즈의 새 악당 베인이 <다크 나이트>의 조커와 비견할 만한 캐릭터인지 궁금해서? 혹은 <메멘토> <다크 나이트> <인셉션> 등을 통해 보여준 놀란의 치밀하고 정교한 이야기 직조 능력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답이 될 수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배트맨 비긴즈>로 할리우드에 프리퀄 붐을 일으키고, <다크 나이트>로 영화적, 예술적, 기술적, 상업적으로 블록버스터영화가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는 찬사를 받은 이래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대한 전세계의 열광은 현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에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담고 있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이 이뤄낸 영화적 업적만으로 ‘배트맨 신드롬’을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놀란의 <배트맨> 3부작에 대한 팀 버튼의 말이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내가 <배트맨> 시리즈를 만들 때만 해도 사람들은 영화가 너무 어둡다며 온갖 욕을 퍼부었다. 최근 놀란의 영화가 관객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그 영화의 어둠 때문이다.(중략) 90년대 당시 우리가 했던 일은 이제 정상적인 일이 되었다.” <배트맨 리턴즈>를 어둡고 음울한 영화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스튜디오와 큰 마찰을 빚고 은퇴까지 고려했던 팀 버튼으로서는 어둠의 영웅에 대한 21세기의 열광적인 반응이 격세지감으로 느껴졌을 거다. 그러나 관객의 인식 변화에 앞서 세계가 변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가 제작되던 90년대 초반은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세계의 경제적 황금기였다. IT산업이 번영했고 하루가 다르게 주가가 폭등하던 그 시절, 굳이 내부의 어둠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이들은 드물었을 것이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세계는 기나긴 불황의 늪에 빠져 있다. 거리에 빈민이 넘쳐나고 테러와의 전쟁이 되풀이되며 정부의 무력함을 체감 중인 미국은, 혹은 세계는 그야말로 고담시의 축소판이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건 소시민적인 매력으로 즐거움을 주는 영웅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오직 아비규환의 세계를 구원하겠다는 일념으로 기꺼이 몸을 내던질 수 있는 고전적인 영웅의 등장이다. 배트맨은 마블과 DC가 창조해낸 수많은 슈퍼히어로 캐릭터 중 이 조건에 가장 잘 들어맞는 영웅이다. 그러므로 방심해선 안된다. 배트맨이 컬트적인 영웅이 아니라 (팀 버튼의 말처럼) “정상적인” 영웅이 됐다는 건 그만큼 우리 세계가 불행하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담아낸 고담시의 모습은 그 어느때보다 위태로워 보인다. 전편 <다크 나이트>에서 고담시의 ‘백기사’로 불렸던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이후, 고담시는 ‘하비 덴트 특별법’을 만들어 1천명의 범죄자를 교도소에 수감한다. 사랑하는 여인 레이첼(메기 질렌할)이 조커에게 살해당한 뒤 광기에 사로잡혀 동료를 죽이고 고든 형사(게리 올드먼)의 가족을 협박했던 하비의 또 다른 모습은 배트맨과 고든 형사의 묵인 속에 영원히 봉인된다. 하비의 죄를 뒤집어쓴 배트맨이 범죄자의 이름표를 달고 브루스 웨인으로 돌아와 은둔하는 사이, 악덕 자본가들은 웨인의 회사를 탐내고 범죄자들은 새로운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겉은 그럴싸하지만 속은 곪아들어가는 고담시의 환부를 자극하는 건 ‘지옥에서 돌아온 용병’ 악당 베인(톰 하디)이다. 한손으로 사람의 목을 비틀어 죽이고 풍채만으로도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베인은 원초적인 두려움을 주는 악당이다. <다크 나이트>의 무정부주의적인 악당 조커(히스 레저)와 달리 베인의 계획은 명확하다. 배트맨의 목숨뿐 아니라 영혼을 빼앗는 것, 그리고 핵폭탄을 만들어 타락한 고담시를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것이다. “조커는 아나키스트였다. 그에게는 계획이랄 것이 없었다. 그가 배트맨을 정말 죽이고 싶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조커는 누구든지 죽이고 싶어 했으니까. 조커의 이런 면모가 3편에서 ‘진짜 악당’의 출현 가능성을 열어줬다. 베인은 지략가이며, 교활하고 헌신적인 악당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다.”(크리스토퍼 놀란)

캐릭터 각각이 자신의 이야기를 갖다

<배트맨 비긴즈>가 배트맨의 잠재력을 일깨웠고, <다크 나이트>가 최강의 적에 맞서 자신의 모든 패를 꺼내 전력질주하는 배트맨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지난 두편의 영화에서 배트맨이 일궈낸 모든 유산을 차례로 거둬들이는 영화다. 배트맨 영화 역사상 이토록 배트맨이 무력하게 느껴지는 영화를 찾아보기란 힘들 것이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배트맨은 이미 지나간 시대의 유물처럼 비쳐진다. 그는 조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무릎 연골을 잃고 신장과 뇌가 손상된 웨인은 예전처럼 고담시의 빌딩숲을 자유자재로 활강할 수 없다.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 레이첼을 잃었다는 상실감은 유년 시절 부모의 죽음을 경험한 뒤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마음의 동굴 속으로 웨인을 다시금 몰아넣는다. 악당 베인의 등장으로 브루스 웨인은 다시 배트맨의 옷을 입지만, 그는 더이상 예전의 배트맨이 아니다. 시리즈를 마무리하려는 제작진이 영웅의 유한함을 드러내는 건 필연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각본가 데이비드 고이어는 “크리스토퍼 놀란과 내가 최초로 생각한 건 이 영화의 엔딩 신이었고, 그 장면은 영화가 완성될 때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고이어가 언급한 마지막 장면에서 배트맨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영웅이 완전히 거세된 장면으로부터 이 프로젝트가 시작됐다는 점에서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지향점을 짐작해볼 수 있을 듯하다. 바로 배트맨이 지닌 과제와 능력을 무(無)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청산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인이 얼마나 파괴적인 악당인지, 혹은 배트맨이 그와 맞서 어떤 대결을 펼칠지- 말하자면 <다크 나이트>를 보는 잣대로- 를 가늠하는 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를 관통하는 다종다양한 에피소드와 인물들이 어떤 관계망으로 얽혀 있으며 배트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눈여겨보는 것이 중요하다. 3부작 중 가장 많은 조연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 영화에선 모든 인물들이 배트맨/브루스 웨인의 과거와 현재에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베인은 <배트맨 비긴즈>에서 브루스 웨인의 능력을 자각하게 했으나 이후 적이 된 라즈 알 굴(와타나베 겐)의 가르침을 이어받는 인물이다. 경찰 존 블레이크(조셉 고든 레빗)는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로 자랐다는 점에서 브루스 웨인과 공통점을 가지며, 노쇠한 고든 형사의 발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배트맨의 중요한 조력자로 기능한다. 재력가 미란다 테이트(마리온 코티아르)는 악덕 자본가에 맞서 배트맨 파워의 기반이 되는 웨인 컴퍼니를 지켜내고, 레이첼의 빈자리를 채워준다. 이중에서 단연 발군의 캐릭터는 캣우먼이다. 배트맨/브루스 웨인과 유일하게 연결점을 찾아볼 수 없는 캣우먼은 과거와 현재의 인연으로 복잡하게 얽힌 인물 사이를 오가며 영화에 활력을 실어준다. 캣우먼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녀가 어떤 신념이나 윤리관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위해 움직이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진지하고 비장한 계획을 가진 DC적 인물들 사이에서 선과 악을 오가며 절도범으로, 테러리스트의 조력자로, 배트맨의 협력자로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캣우먼은 <다크 나이트>의 조커만큼은 아니더라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비록 배트맨이 예전의 힘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그로 인해 볼거리마저 줄어든 건 아니다. 이전 두편의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와이어 액션을 대신해 배트맨이 벌이는 공중전을 뒷받침해주는 건 루시우스(모건 프리먼)가 개발한 비행용 차량 ‘더 배트’다. 시가지 전투에 용이하고 건물 사이로 비행할 수 있도록 제작된 더 배트의 등장으로 배트맨의 공중전은 더욱 현란하고 격렬해졌다. <다크 나이트>에서 처음 선보인 배트포드는 캣우먼의 차지다. 그녀의 검은 가죽옷, 날렵한 몸매와 혼연일체된 채 도로를 질주하는 배트포드는 전편에서 볼 수 있었던 배트맨의 중후한 액션과는 다른 느낌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이들 장면을 돋보이게 하는 건 아이맥스와 70mm 필름을 함께 담아낸 촬영이다. 두편에서 할리우드 장편상업영화 역사상 최초로 35mm 필름에 아이맥스를 접목한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친 놀란은 두배로 넓어진 필름의 크기만큼이나 깊고 디테일한 질감으로 배트맨의 세계를 담아냈다. 특히 영화의 초반부 대형 비행기로 소형 비행기를 격추시키는 베인의 핵물리학자 납치 장면은 아이맥스 촬영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크 나이트>의 조커의 은행 습격이나 배트맨과 조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 같은 명장면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는 부족하다는 점이 아쉽다.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액션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는 만큼, 이 영화의 카메라는 특정 인물을 심도있게 쫓기보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직면한 고담시의 모습을 부감으로 담아내는 데 많은 장면을 할애한다. 일례로 수많은 경찰차에 둘러싸인 배트맨, 베인 일당과 경찰 집단의 전투장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케 하는 아비규환 속의 고담 시민들을 수직으로 조명하는 카메라는 <배트맨 비긴즈>에서 우물에 빠진 어린 브루스 웨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모든 인물은 고담시라는 고립된 우물에 빠져 있다. 핵폭탄을 제거하는 건 영웅 배트맨의 임무이겠지만, 고통과 어둠의 우물 속에서 올라와야 하는 건 캐릭터 각자의 몫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서사 전략

죽음과 악에 대한 배트맨의 근원적인 고민을 고담시 전체의 것으로 확장시키는 놀란의 서사 전략은 ‘혁명’이다. 그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한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와 프리츠 랑의 영화 <메트로폴리스>를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계급간의 갈등과 투쟁 혁명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들 작품을 놀란이 차용하는 방식은 상당히 도발적이다. 무정부상태에 빠진 고담시를 점령하고 자본가들에게 ‘사형 혹은 추방’을 선고하는 시민 폭도들은 영락없이 지난해 말 뉴욕에서 벌어진 월스트리트의 점거 시위를 떠올리게 하는데, 놀란이 창조한 세계에서 배트맨과 경찰 집단은 이들 세력과 대립하며 정확히 반대되는 영역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의 중심부 월스트리트가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최후의 전투를 보고 있노라면 놀란의 정치적 견해가 ‘불건전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기도 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다크 나이트>에 비견하는 걸작이라 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편의 영화를 거치며 생성된 수많은 플롯의 여백을 유려한 솜씨로 메웠고, 전편을 넘어서는 기술의 혁신을 이뤄냈으며, 평생 스스로를 옥죄던 자아의 감옥으로부터 끝내 탈옥하고야 마는 영웅의 성장담을 감동적으로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시리즈의 마무리로 손색이 없는 영화다. 이만하면 휩쓸려볼 만한 폭풍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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