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 브레송은 영화를 일컬어 ‘두번의 죽음과 세번의 탄생’을 겪는 매체라 칭했다. 작가의 머릿속에서 태어나 시나리오 위에서 죽고, 다시 촬영 때 부활해서 필름 위에서 죽은 뒤, 편집을 통해 스크린에서 소생하기 때문이란다. 가끔 시네마테크에 들를 때 이 문구가 생각난다. 시네마테크 본연의 기능이 그가 일컫던 영화를 ‘세번의 죽음과 네번의 탄생’으로 바꾸는 게 아닌가 싶어서다. 컴컴한 깡통으로 들어간 필름이 시간을 보낸 뒤 극장에서 다시 관객과 만나는 순간, 봉인됐던 감독의 영화가 태생과는 조금 다른 공기를 안고 생기를 되찾는다. 올해도 어김없이 서울아트시네마에선 시대와 장르를 불문한 다양한 영화들이 ‘시네바캉스 서울’이란 테마로 모인다. 올해로 7회째를 맞는 이 영화축제는 7월26일부터 한달간 계속된다.
섹션1: 시네필의 바캉스
영화는 공기를 머금는다. 사실 영화가 세상에 공헌한 것은 사상이 아니라 어쩌면 감정의 공유일지도 모른다. 물론 바캉스가 가져오는 일련의 감정들도 존재한다. 그 정서가 풍성하게 담긴 초록빛과 푸른 바다의 이미지를 첫 번째의 섹션에 모았다. 장 외스타슈의 <나의 작은 연인들>(1974)이 그중 하나다. ‘보르도’ 주변의 시골에서 시작해 스페인 국경에 근접한 남불의 마을 ‘나르본’까지, 이 작품은 두 마을의 정서를 꼼꼼히 담는다. 감독의 자전적 스토리에 기초한 주인공 소년의 성장기는 아름답진 않지만 그렇다고 우울하지도 않다. 뚜렷한 스토리라인 없이도 절제된 영화적 요소의 결합이 묘한 감동을 전한다.
특별한 사건이 없기는 자크 로지에의 <오루에 쪽으로>(1969)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서부 ‘방데주’의 해변마을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데, 그곳으로 여행을 떠난 세명의 파리지엔이 이야기를 이끈다. 영화의 내용은 주로 여자들의 수다와 공간의 정서만으로 채워진다. 감독은 시나리오라기보다 초안에 가까운 상황만을 던져주고 2시간이 넘는 상영시간을 채우는데, 오직 바캉스라는 특정 시간과 빛의 굴곡, 캐릭터 조합만으로 영화가 완성된다. 원본이 16mm 필름으로 촬영된 것을 생각할 때 화면에 담긴 풍광과 습기, 초가을의 하늘빛은 놀라울 정도로 풍성해 보인다. 한편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인 62년의 프랑스를 담은 <야생 갈대>(1994)의 촬영지는 앙드레 테시네의 고향이기도 한 ‘미디피레네’다. 라퐁텐의 우화 <굽혀지나 부러지지 않는 갈대>에서 제목을 딴 이 작품은, 격앙된 분노에 담긴 십대들의 사랑 이야기를 자연경관과 더불어 정서적으로 유려하게 풀어낸다.
섹션2: 서신교환
영화를 볼 때 염두에 두면 좋을 두 가지의 극단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 그리고 보이진 않지만 짐작할 수 있는 요소들이 바로 그다. 한데 이들은 또한 무수히 많은 갈래로 나뉜다. 눈앞에 펼쳐진 이야기와 보이진 않지만 의도한 이야기들, 들리는 대사와 생략된 대사, 그리고 보이는 문구와 보이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문구, 또 현실의 소리와 비현실의 사운드 등이 그렇다. 두 번째 섹션은 지리적으로 떨어져 사는 감독들간의 ‘서신교환’ 영화를 담는다. 이를 원활히 감상하기 위해선 위 요소들을 의식적으로 구분하는 훈련이 도움이 된다. ‘바르셀로나 현대문화센터’ 주관으로 진행된 감독들간의 서식교환 프로젝트는, 일부가 국내 영화제를 통해 상영된 바 있지만 전체가 상영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08년부터 진행된 <이사키 라쿠에스타-가와세 나오미>의 서신교환은 단 한번의 만남, 그 5분간의 대화를 토대로 시작된다. 이들이 주고받은 영상은 총 7편인데, 두 사람 사이엔 동서양의 정서 차이와 남녀간의 온도 차가 미묘하게 뒤섞여 있다. 이 엇갈림이 어우러져 결국 한편의 온전한 영화가 완성되는데, 이를 조합하는 건 관객의 몫이다. 미국 아방가르드 필름의 대가인 요나스 메카스도 스페인의 감독 호세 루이스 게린과 서신을 주고받는다. 2009년과 2011년 사이에 오고간 이들의 편지에서 먼저 말을 건네는 이는 호세 루이스 게린이다. 그가 파리의 기억을 에세이 형식으로 전하면, 요나스 메카스가 현재의 자신을 보여주는 식으로 바통을 이어받는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 흑백과 컬러, 디테일과 관조를 오가던 교감이 쌓여, 마침내 둘은 세대 차를 극복하고 영화적 동반자로 거듭난다.
섹션3: 이미지의 파열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전반에 걸친 ‘인종차별주의 철폐와 베트남전쟁’ 등의 사회현상은 영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신좌파의 대항문화가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반체제 운동을 낳게 된 것이다. 이 섹션에선 당시 파격적인 발상으로 새로운 할리우드영화를 이끌고, 컬트적 매력을 발해 작가적 성향의 작품을 선보인 여러 감독들의 작품을 모았다.
비주얼의 측면에서는 두 감독이 먼저 눈에 띈다. 이제는 거장이란 수식이 자연스러운 마이클 만과 리들리 스콧의 친동생인 토니 스콧이 바로 그다. 마이클 만은 데뷔작 <도둑>(1982)과 86년작 <맨헌터>를 통해 초기부터 자신만의 화면 구성력을 증명해 보이는데, 이는 그 특유의 비장감뿐 아니라 이야기 전달 측면에서도 효율적이다. 이렇듯 마이클 만이 에로티시즘을 제외한 멜랑콜리의 필름누아르를 개척하는 동안, 토니 스콧은 수년간 상업광고를 만든 경력으로 당시 유행의 조류를 이끈다. 그 화려한 비주얼의 데뷔작이 이번에 소개되는 <악마의 키스>(1983)다. 명암대비가 강하고 명확하며 감각적으로 프레이밍된 뱀파이어영화로, ‘카트린 드뇌브, 데이비드 보위, 수잔 서랜던’의 연기 앙상블이 훌륭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탐미적 성향을 고수하는 동시에, 당시 미국사회의 반영웅주의적 사회흐름을 요약해 보여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물론 B급 호러의 감수성이 돋보이는 거장들의 작품,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1983)과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1981) 등도 놓쳐선 안된다. 이 대단한 감독들의 초기작을 극장에서 감상할 기회란 그리 흔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섹션4: 좀비의 정치학
60, 70년대 좀비영화는 미국사회의 흐름을 예의 주시하면서 그를 적절하게 반영하려 애쓴다. 이는 1964년에 만들어진 걸작 <지상 최후의 사나이>에서도 발견된다. 이 섹션에서 소개되는 영화는 총 4편인데, 그중 이 영화에 등장하는 귀신은 좀더 특별해 보인다. 비록 외모는 좀비이지만 그들은 뱀파이어적인 습성을 지녔다. 즉, 마늘을 무서워하며 밤에만 활동한다는 점에서 혼합적이다. 하지만 인간의 주먹에 단번에 나가떨어지고 지능이 낮다는 점은 우스꽝스럽다. 물론 이 좀비의 특성이 당대의 ‘군중’을 대변한다는 점에서는 마냥 웃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60년대 후반에 이르러 미국 좀비영화의 재정비를 이끌었다는 평을 듣는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바로 이 <지상 최후의 사나이>의 영향을 받아 완성된 작품이다. 로메르의 ‘시체 3부작’의 첫 작품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당시 미국사회를 반영하는 풍자의 시선이 담겼단 이유로 본격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선과 악의 도덕적 개념이 강조되지 않던 당대 성향과 어우러져 영화는 크게 성공하는데, 때문에 1990년 톰 새비니에 의해 동명의 제목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한다. 원작과 리메이크, 두편 모두가 올해 섹션에 포함됐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과정이 동일하더라도 주인공의 성격과 마지막의 결론에서 차이를 보인다. 서로 다른 시대상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브루스 맥도널드의 2008년작 <폰티풀>을 최근의 상황과 연계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한정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이 최신의 좀비영화는, 오늘날 체제의 폭력성과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명민하게 경고를 던진다.
비평교감 행사
네 가지 정기상영 이외에도 여러 특별행사가 준비돼 있다. 그중 ‘비평교감’ 프로그램이 특히 눈길을 끈다. 행사는 감독들간의 ‘서신교환’ 영화가 한편 상영된 뒤, 2명씩의 평론가들이 모여 비평담론에 관한 서로의 입장과 의견을 나누는 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8월2일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 8시, 김영진과 유운성이 <이사키 라쿠에스타-가와세 나오미>의 작품이 끝나고 나서, 장병원과 정지연이 <하이메 로살레스-왕빙>의 영화가 끝나고 나서, 8월9일 마지막으로 변성찬, 남다은이 <페르난도 에임브케-김소영>의 영화가 끝난 뒤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전문평자들이 현재의 영화에서 무엇을 근심하고 있으며 또한 어떠한 문제점들을 집어낼지를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