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때문에 꽤 많은 드라마를 본다. 물론 일이 아니더라도 자진해서 챙겨볼 만큼 재미있는 작품은 방영 중 드라마의 3분의 1도 되지 않고,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드라마는 그중에서도 절반 정도다. 그런데 2010년 방송된 SBS <산부인과>는 그 흔치 않은 경우 중 하나였다. 태아와 산모의 생명을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특수 상황에서 의사들의 고뇌가 담긴 에피소드들도 인상적이었지만 정말로 마음에 들었던 건 주인공 서혜영(장서희)과 엄마(양희경)의 관계였다. 드라마 속 수많은 의사들이 가족을 병원에서 잃은 트라우마나 천재 의사였던 부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숙명처럼 안고 등장하는 것과 달리 그저 똑똑하긴 한데 나이 찬 딸을 시집보내지 못해 골머리를 썩는 엄마와 그런 엄마에게 한없이 무뚝뚝한 딸의 관계가 건조하고 평범해서 좋았다. <산부인과>의 최희라 작가를 만나고 싶었던 건 그 묘한 모던함 때문이었다. 2년간의 취재와 고민 끝에 데뷔작 <산부인과>를 집필했고 “드라마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경계가 느껴지지 않는,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 얘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의 다음 작품을 어서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MBC <파스타>의 권석장 감독과 이선균의 재회로 화제를 모은 MBC <골든타임>이 바로 그의 두 번째 미니시리즈다. 의대를 졸업했지만 느긋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어 인턴도 하지 않고 한방병원 임상강사로 칼퇴근을 지키며 살던 이민우(이선균)는 선배의 여자친구 강재인(황정음)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10중 추돌사고 현장에 휘말린다. 일상이 응급상황으로 바뀌는 게 순간이듯, 그가 별 생각 없이 갔던 응급실 아르바이트에서 기관 삽관과 절개를 하지 못해 어린 환자를 사망하게 만드는 것도 몇 십분간에 일어난 일이다. 결국 늦은 나이에 인턴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한 이민우는 면접에서 지원 사유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저에게 절대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환자를 언젠간 대면해야 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중증 외상환자의 생존이 결정되는 1시간’이라는 의미의 제목을 가진 이 드라마는, 그러니까 자신의 두려움과 직면하는 용기에 대한 이야기다. 웅장한 BGM과 현란한 메스의 움직임 대신 침묵과 조바심 속에 살이 찢기고 피가 울컥이며 쏟아져 나와 수술복을 적시는 순간에는 베테랑 의사 최인혁(이성민)조차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을 감추지 않는다. 면접 때 최인혁이 이민우에게 던진 “의사는 무엇이 가장 두려울까요?”라는 질문은 자신의 손에 누군가의 생명이 달려 있다는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지향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우선시하는 가치가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하는 어려움은 사실 우리 대부분의 일상을 지배한다. 하지만 촌각을 다투는 사고들이 예고 없이 발생함에도 수술실이 없어 선배 의사에게 양보를 부탁했다가 “환자만 앞세우면 서열이든 병원 내 규칙이든 다 무시할 수 있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라는 호통을 듣고, 교수가 집도한 수술 이후 출혈이 발생한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가 따귀를 얻어맞는 것조차 누군가의 목숨을 살리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처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과 맞닥뜨리더라도 깨지고 부딪히며 책임져야 한다는 것임을, 환자를 잃은 뒤 택시 안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저 의사입니다”라고 몇번이나 되뇌던 이민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새벽 4시경, 조용한 새벽 공기를 찢고 달려가는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예전에는 그저 시끄럽게만 여겼을 그 소리를 들으며 한참 생각에 잠겼다. 지금 생명이 위험한 누군가와, 그가 세상을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누군가와, 그를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을 누군가들에게 마음으로부터의 기도를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