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 그는 2005년 이후 망명객이 됐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타지키스탄으로, 다시 프랑스로, 또다시 영국으로 테러 위협을 피해 옮겨다니는 실정이다. 인권운동가이며 진보주의자인 그의 비판적 시선과 의견을 곱게 보지 않는 이란 내 보수세력 때문이다. 2009년 개혁파 대통령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이후 상황은 더 좋지 않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에도 영화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고 또 하나의 결과물로 신작 <정원사>를 완성했다. 이 작품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펀드 후반작업 지원부문 선정작 중 하나가 됐다.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였다는 후문이다. 부인, 아들과 함께 후반작업을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신작 <정원사>가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펀드(ACF) 후반작업 지원부문에 선정됐다. =나와 나의 가족이 부산영화제로부터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방면으로 지원을 받아왔다는 말부터 해야 할 것 같다. 14년 전에는 심사위원 자격으로 부산을 찾았고, 부산을 통해 우리 가족의 회고전이 열린 적도 있고, 부산이 운영하는 영화학교 교장으로 참여한 적도 있다. 나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 부산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다. 또한 우리 이외에 아시아 지역 감독들 역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지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정원사>는 편집이 끝난 상태고 이번 지원으로 색보정, 사운드 믹싱, 35mm 프린트 전환 작업 등을 할 수 있게 됐다.
-ACF 후반작업 지원부문에 지원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부산영화제를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아시아에서 열리는 영화제 중에서 가장 특별한 영화제가 아닌가. 특히 나와 같은 아시아 지역의 독립영화인들을 지원해준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번 체류 기간 동안 김동호 명예집행위원장의 다큐멘터리도 찍는다고 들었다.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김 위원장을 자주 만날 때마다 그의 열정에 매번 놀랐다. 이런 일이 있었다. 2∼3년 전 일이다. 정말 우연히 파리의 퐁피두센터에서 김동호 위원장을 만나게 된 거다. 그때 내가 말했다. “언젠가 당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그랬더니 그는 “아니다, 내가 당신을 찍겠다”고 그러더라. (웃음) 이번 방문을 계기로 마침내 미스터 김(김동호)에 관해 촬영하게 된 것이다. 그는 지금 75살인데도 첫 번째 영화를 만들고 있지 않은가. 예술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대단하다는 점에서, 계속 도전한다는 점에서 그는 인생의 어떤 귀감이다. 결코 은퇴가 없는 사람이랄까.
-신작에 관해서도 말해보자. <정원사>는 어떤 영화인가. =일단 이 영화가 이란의 소수 종교 신자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정도만 말해두고 구체적인 부분은 영화가 상영되고 난 다음 하는 게 좋겠다. 그들은 대학을 갈 수도 없고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 살해당하기까지 한다. 내가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다룬 것과 같이 일종의 인권운동 차원으로 그들을 조명하게 된 것이다.
-그럼 이렇게 물어보자. <정원사>는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나. =이란은 알다시피 대표적인 종교국가다. 때문에 종교를 바꾸는 행위 자체가 용납되지 않고 그렇게 하려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이란의 핵개발을 하나의 예로 들고 싶다. 여기에는 종교적인 기반이 있다. 이슬람 국가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훌륭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무력을 강화해서라도 종교를 확대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이란 국민이 겪고 있는 현실적 압박은 말할 것도 없다. 예컨대 술을 한번 먹으면 약간의 처벌, 두번 먹으면 더 심한 처벌, 세번 먹으면 처형된다. 이란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부분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해보고 싶었다. 다만 종교가 가진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두 가지 점에 대해 다 말하고 싶었다. 가령 ‘종교가 이란을 망치고 있다’는 건 나의 아들 세대의 생각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종교가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면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두 가지를 제시하고 관객에게 판단하게 하고 싶었다.
-모흐센 마흐말바프, 메이삼 마흐말바프, 이렇게 부자가 영화에 함께 등장한다. =그렇다. 두개의 카메라, 두개의 앵글을 사용했다. 상반되는 세대의 시각을 담아내려 한 것이다. 특히 현재 이란에 있는 젊은 세대들은 종교적인 행위에 많이 지쳐 있다. 신정일치라는 미명하에 다른 사람을 강간하고 고문하는 그런 사회를 용인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은 권력과 종교가 이제 결별하기를 바라고 있다. 나와 아들이 영화에서 토론을 하는 형식은 그런 각자의 세대를 대변하는 차원의, 일종의 ‘연기’ 같은 것으로 봐주면 좋겠다.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인가. =이란 전반적으로 종교에 대한 입장은 세 가지다. 나이든 세대는 지금 이란의 종교가 중요하고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시각은 나의 세대 정도 되는 사람들인데,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개선될 여지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가 나의 아들 세대들의 의견이다. 종교가 이란사회를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술을 마신다든지 생각이 좀 다르다든지 하는 문제로 처벌을 받는 것이 반인권적 상황이라는 것이다. 몇년 전에 있었던 녹색운동(이란 내 개혁운동) 역시 이런 반작용의 결과일 것이다. (옆자리의 아들을 가리키며) 젊은 세대인 내 아들에게 한번 물어보는 건 어떻겠나.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다. (웃음) 몇년 전 테헤란에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젊은 여성들이 히잡(종교 의례를 따라 이란 여성들이 머리에 쓰는 두건)을 쓰기는 하지만 머리에 대강 걸친 걸 많이 보았다. 종교적인 규칙을 지키기는 하지만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인상이었다고나 할까. =(메이삼 마흐말바프) 제대로 본 거다. 그게 바로 진실이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진심으로 그 규칙 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지키는 것이다. 안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동의하지 않고 반대한다는 표식을 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일종의 상징적인 시위라고 할까. 실질적으로는 히잡이라는 의복 차원의 문제를 떠나 사상이나 의식을 강요받는다는 게 더 큰 문제다. 방금 말한 히잡을 그런 식으로 반대하는 것처럼 사상이나 의식의 반작용으로 녹색운동이 생겨난 것이다.
-2009년 6월에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정부가 재집권했다. 대규모 시위가 있었을 때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 당신은 개혁파 후보 미르 호세인 무사비의 해외쪽 대변인을 자처했다. 무사비를 지지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우선, 아마디네자드는 가짜 대통령이다. (웃음) 실제 이란을 지배하는 종교 지도자 호메이니의 스피커에 불과하다. 이란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대안이 필요했다.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독립영화인들, 예술가들이 모여서 무사비를 지원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그런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나의 이름을 사용하도록 내가 용인해준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대변인의 역할을 하면서 이런저런 데 많이 참여했다. 수천번의 인터뷰를 했고 여러 곳에서 이란사회의 비전에 대한 나의 의견도 밝혔다. 실제로 이란사회의 변화는 전세계적으로 중요하다. 이란이 테러를 지원하는 국가가 될 수도 있고 민주주의를 지원하는 국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동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보건대 테러를 지원하는 국가가 도움이 되겠는가 그렇지 않은 국가가 도움이 되겠는가. 지금 이란사회 지도부는 오히려 북한 지도부와 유사하다.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냉장고에 사람을 넣어 묘지에 묻어버리며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을 당신은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
-말하기는 싫겠지만 당신이 처한 안타까운 망명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걸 묻고 싶다. 당신과 당신 가족에게 가해진 테러의 위협, 신체의 위협이란 어떤 것들이었나. 그간의 사건들을 말해줄 수 있나(예컨대 2009년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딸이자 감독인 사미라 마흐말바프의 영화 현장에서는 폭탄 테러가 있었다). =이란 정부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죽이려 한다. 내가 이란사회에 대해 말과 글과 영화로 비판을 해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란의 정치 지도자들은 나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 내 영화에 대한 검열과 탄압이 참지 못할 정도로 심해지자 어쩌지 못하고 우리 가족은 2005년에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망명 이후에도 우리를 살해하려는 시도는 계속 있어왔다. 사미라의 영화 현장에서 있었던 일은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내가 7년 전 아프가니스탄에 머무르던 그때에도 폭탄 테러가 시도됐고 심지어 우리가 머무르는 게스트하우스의 음식에 독극물을 타넣는 일도 있었다. 내가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동안에도 이란 지도층 일부의 은밀하고 부패한 사생활을 고발하는 글을 썼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는 타지키스탄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지금은 그곳에 갈 수도 없다. 지금 타지키스탄에 간다면 우리는 바로 이란 정부에 인도될 것이고 그 길로 감옥에 갈 것이다. 2년 전에 거처를 프랑스로 옮긴 뒤에도 적어도 두번 정도 테러리스트로부터 신체적 위협을 받았다. 때문에 프랑스 정부에서 보디가드를 붙여줬지만 사생활 보호가 안되어서 그건 거절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전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는 집시인 거다.
-마흐말바프 가족의 영화 만들기는 우리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이번 한국 방문에는 부인, 아들과 함께 왔는데, 큰딸 사미라, 작은 딸 하나의 최근 근황을 궁금해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다. =막내딸 하나는 녹색운동 당시에 영화 한편을 만들었다. 제목은 <그린 데이즈>. 베니스에서 상영했다. 현재 영국에 머무르면서 친구들과 단편을 만들고 있다. 사미라의 경우는 녹색운동 당시에 영화제 때문에 해외에 머무르면서 이란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했는데 그걸 빌미로 또 협박받고 있다. 역시 영국에 있다.
-당신이나 당신 가족에게 어려운 시기다. 하지만 그런 점에서 더욱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듣고 싶다. =이런 비유를 한번 해보자. 내가 화가라고 치자. 내가 화창한 날씨에 강변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데 그 순간 강가에 누군가가 빠져 죽어가고 있는 걸 목격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나는 이 아름다운 그림을 계속 그릴 것인가 팽개치고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달려갈 것인가. 나는 그 사람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가 나이며 지금 익사하고 있는 것이 이란이라는 사회다. 구체적으로는, 유럽에 있는 이란의 이산민들에 대한 영화를 차기작으로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