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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러시아 문학에 바치는 진혼곡
이다혜 2012-07-19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 을유문화사 펴냄

지금은 사그라든 조국의 문학에 바치는 진혼곡.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그런 책이다. 쉽게 말하면 러시아 소설에 대한 책이고, 미국 웰즐리대학과 코넬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강의하기 위해 작성한 강의록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피해 가족과 함께 망명한 뒤 후일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롤리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책은 그가 어디까지나 ‘러시아’ 작가였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책에 대한 책, 책 읽어주는 책이라고 하면 보통은 플롯 분석, 좋은 대목 인용, 작가와 작품의 의의 정리와 감상이 실리는데, 이 책은 그 이상이다.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러시아 작가, 검열관, 그리고 독자’라는 글로 시작하는데, 19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러시아 역사가 문학에 얼마나 치명적인 독이 되었는지를 비판한다. “정부와 혁명주의자, 차르와 급진주의자들은 모두 똑같이 예술에 대해서는 속물이었다. 폭정을 뿌리뽑고자 했던 좌파 비평가들은 다시금 자신들의 폭정을 심어 놓았다.” 소설가와 그의 작품을 소개하기에 앞서 나보코프는 신신당부한다. 러시아 소설에서 러시아의 정신이 아니라 천재 개개인을 찾으려 노력하자고. 거작을 둘러싼 틀이나 틀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아니라 거작 자체를 보자고. 그리고 이어지는 글에서 나보코프는 ‘위대한 소설의 시대’였던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핵심적인 작가로 꼽은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고리키를 읽는다.

본격적으로 니콜라이 고골의 <죽은 혼>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면 이번에는 러시아어에서 영어로(우리의 경우에는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그리고 한국어로) 번역된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눈에 밟힌다.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구사했고 영어를 창작 언어로 사용할 만큼 능숙했던 나보코프는 번역된 책들이 저지른 실수와 그 실수로 인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독자들이 놓칠 수밖에 없었던 작품의 묘미를 지적한다. 러시아 자작나무가 너도밤나무가 되고, 사시나무가 물푸레나무가 되는가 하면, 사변적이지만 러시아 사람들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대화가 아예 통째로 삭제되기도 했다. 번역에 대한 지적은 계속 이어지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지하로부터의 회고록’, ‘쥐구멍에서의 회고록’으로 번역되어야 맞다. 여주인공의 이름은 번역자들에게 특별히 골칫거리가 되는데, “카레닌의 아내 안나를 안나 카레리나라고 옮겨놓으면, 이후 그녀의 남편을 카레니나씨라고 불러야 할 텐데, 그러면 레이디 메리의 남편이 메리 경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웃지 못할 상황이 되고 마는 것이다”. 언어적이고 문화적인 이러한 틈을 통해서 새어나가버린 원전의 아름다움에 보다 가까이갈 수 있게 돕는 책이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인 셈이다. 한장이 끝날 때마다 그 작품을 찾아 읽고 싶게 만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