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사찰 문제가 조용히 덮일 위기의 땅에서 <차일드 44>를 읽는다는 것은 스릴보다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1950년대 스탈 린 치하의 소비에트 연방은 범죄 없는 땅이다. 모든 사람이 감시 당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을 고발해야 충성심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미심쩍은 죽음은 수시로 발생하지만 그것은 다 그럴 만한 일이거나 혹은 사고일 뿐. 국가안보부 MGB(비 밀경찰 KGB의 전신) 소속인 레오는 살해 의혹이 있는 부하의 아들이 죽은 사건을 깊게 파헤치는 대신 반역자로 낙인찍힌 인물을 끝까지 추적해서 잡아오는, 능력을 인정받은 요원이다. 어느날 그는 아내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차일드 44>는 악명 높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부터 시작해 52명의 여자와 아이를 살해한 구소련의 연쇄살인범을 모티브로 삼았다. 범죄를 부정하는 믿음을 앞장서 실천하던 주인공이 어떻게 체제에 반하는 연쇄살인 수사에 앞장서는가 하는 과정이 실제 범인의 정체만큼 소름돋는 박력으로 다가온다. 2009년 출간되었으나 절판되었다가 독자들의 요청으로 재출간되었다.
시리즈물을 읽을 때 가장 난감한 점을 꼽으라면 순서를 맞춰 읽어야 한다는 압박이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가는지가 사건보다 더 강한 울림을 낳을 때도 있으니까. 리 차일드의 ‘잭 리처’ 시리즈는 그런 부담감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잭 리처는 떠돌이기 때문이다. 혼자 다니는 정체불명의 남자 잭 리처는 낯선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의 용의자 취급을 받는 일이 예사다. 그 누구보다 뛰어났으나 조직에 순응하는 능력은 갖지 못했던 퇴역 군인 잭 리처는 <61시간>에서 버스 사고로 체류하게 된 작은 마을에서 증인으로 나서야 하는 노부인을 보호하는 일을 돕게 된다. 고용창출과 지역경제 살리기 라는 구호 아래 혐오시설을 적극 유치하는 일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숙고를 담고 있기도 하다. 교도소를 유치한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암투는 전후에 버려진 군사시설과 물품들의 비밀과 깊숙이 연관되어 잭 리처를 끌어들인다. 탁상공론보다는 몸으로 부딪치는 데 능한 잭 리처의 캐릭터가 돋보이는 최후의 액션 시퀀스가 발군.
술술 읽히는 <용서할 수 없는>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주인공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확신할 수 없다. 할런 코벤의 <용서할 수 없는>이 지닌 ‘책장 훌훌 넘기게 만드는’ 매력은 거기 존재한다. 가출 청소년을 돕는 선량한 남자 댄이 TV쇼의 카메라 앞에서 소아성애자로 체포된다. 모든 증거가 완벽한데 댄은 무죄를 호소하다가 피해자의 아버지에게 총을 맞는다. 그를 고발한 프로그램의 스타 기자 웬디는 시체조차 찾지 못한 댄의 총격사건에 책임을 느끼고 조사를 시작하는데, 인근 여학생의 실종사건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특히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최상류층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져야 했던 월스트리트의 사람들을 묘사하는 방식과 인터넷에서 말이 말을 낳으며 한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는 현 세태를 끌어들인 솜씨가 좋다. 엔딩에 가닿기 전에는 누구를 믿어야 할지 끝까지 긴가민가하게 만드는 할런 코벤의 글솜씨는 명불허전. 예닐곱 시간을 때워야 하는 이동시간이 포함된 여행을 앞두고 있다면 가방에 챙겨넣기를 권한다.
“내가 니 엄마로 보이니?”라는 괴담을 마음 깊은 곳에서 떨쳐 내지 못한 남자가 있다면? 어렸을 적,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했다가 집에 돌아오니 모르는 여자가 어머니 행세를 했다는 의심을 착각으로 치부하고 살아온 료스케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뿐인 집에서 이상한 노트를 발견한다. 노트의 내용은, 어느 사이코패스의 수기. 어렸을 때부터 손에 피를 묻히는 쾌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의 고백. 사라진 애인 때문에 속앓이를 하던 료스케는 부모의 집에서 발견된 수기를 쓴 사람이 누구일까에 대한 불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유리고코로>는 정서적 충격, 의심, 감동으로 이어지는 심리스릴러라고 할 수 있다. 일상을 차분하게 묘사할 때의 아득함이나 애절한 감정이 특히 좋은데, 엔딩에서의 충격을 위해 충격적인 사건이 그저 도구로 쓰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남기기도 한다. 분량이 길지 않고 일인칭 시점에서 묘사되기 때문에 몰입도가 좋은 편이고 주인공의 감정선을 그대로 따라 반전에 이르는 과정이 편리하다는 점이 장점.
<개의 힘>에는 책 사이에 ‘<개의 힘> 주요 인물 및 단체 목록’이 끼워져 있다. 앞장은 마약수사전담반과 바레라 카르테, 치미노 조직 등 주인공들을 둘러싼 조직의 주요 인물 소개와 주요 단체의 명칭, 약어가 적혀 있고, 뒷페이지에는 멕시코와 엘살바도르를 비롯해 이 소설에 나오는 주요 무대가 그려져 있다. 금주법의 시대가 <대부>를 낳았듯 1975년에서 2003년에 이르는 시간을 배경으로 한 멕시코의 마약전쟁이 <개의 힘>의 산실이다. 조직원과 경찰들이 파리목숨처럼 스러져가고, 그에 못지않게 두목의 자리도 자주 위협받고 실제로 교체되는 세상. 책 2권이 도합 1천 페이지인데 초반 한동안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사연을 따라 피칠갑이 될 때까지 구경하는 일이 반복된다. 그러다보면 미국 정보부 산하 조직의 자금줄이 멕시코 마약조직이라든가, 멕시코 대지진으로 인한 복구자금이 필요했던 정부 역시 멕시코 마약조직이 도왔다든가 하는 실제 역사의 장면들이 주인공들과 오버랩되고, 마침내 그 수많은 인물들의 관계와 이름을 자연스럽게 숙지하게 된다. 그리고 알게 된다. 모든 영웅은 악당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새삼스러울 건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새롭다. 에드거 앨런 포의 대표작 16편과 최고로 인정받는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가들의 포 헌정 에세이 20편이 실린 <더 레이븐: 에드거 앨런 포의 그림자>는 그래서 놓치기 아깝다. 단편마다 헌정 에세이가 물려 있는데, 로렌스 블록, 마이클 코넬리, 테스 게리첸, 스티븐 킹, S. J. 로잔, 제프리 디버를 비롯한 작가들이 글을 썼다. 로 렌스 블록은 자신이 오랫동안 에드거상을 받고 싶어 했으나 받지 못했던 게 사실 ‘아몬틸라도의 저주’ 때문이며, 자신이 그 저주를 어떻게 풀었는지 밝힌다(에세이 전체가 재치있는 농담이다). 스 티븐 킹은 <고발하는 심장>이 시대를 초월해 미래의 어둠을 예견 했다고 말한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광기의 목소리는 후대에 이르러 더욱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후일 수많은 걸작들에서 활용된 미스터리와 호러의 거의 모든 기초공사가 포 한명에서 완성되었음을 밝히고 즐거워하는 작가들의 팬심이 재미있는 책.
“우선 1권만 사자는 생각을 했다가는 새벽 3시에 다음 권을 찾아 거리를 헤매게 됩니다. 그러다가 감기 걸려요.” 미야베 미유키의 재치있는 코멘트가 띠지에 실린 <시귀>가 5권으로 완역되었 다. 예전 듬성듬성 번역된 3권짜리 <시귀>를 읽었다 해도 다시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는 바로 ‘완역’에 있다. 전나무로 둘러싸여 자생하는 하나의 마을이자 사회인 소토바에 이방인 가족이 이사온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그들, 그리고 퍼져가는 죽음의 수수께끼. 동양 흡혈귀물의 걸작인 <시귀>는 서양의 뱀파이어물과는 또다른 방식으로 장르를 재구축한다. 수많은 등장인물의 시점으로 벽돌을 쌓아올리는 구조는 소토바라는 작은 마을을 눈앞에 선명히 그려내고, ‘죽은 이가 다시 무덤에서 일어난다면?’이라는 질문에 답하는 수많은 방법(그중 하나는 당신의 그것과 닮아 있으리 라)을 실현해낸다. 여름휴가를 이 다섯권의 책으로 채워도 좋지않을까, 과감하게 제안하고 싶은 공포-서스펜스.
하드보일드 <고독한 곳에>와 초자연적 스릴러 <숨은 강>
여성 독자로서 하드보일드 소설을 읽는다는 건 꽤나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여인들은 왜 인간적으로 결함 많고 때때로 허세를 부리는 남자주인공에 그리도 쉽게 빠져드는지. 혹은 주요한 여성 캐릭터는 왜 하나같이 살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팜므파탈’인지. 여성 작가 도로시 B. 휴스의 <고독한 곳에>는 남성 중심적인 하드보일드·누아르 소설의 한계를 다른 시선으로 보완해주는 작품이라 반갑다. 3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이자 LA의 여성 연쇄살인범 딕스 스틸의 내면을 쫓는다. 딕스에겐 두개의 자아가 있다. 종전 이후 살인의 본능을 LA의 밤거리에서 은밀하게 드러내는 살인범의 자아, 그리고 영원한 사랑을 찾아 헤매는 순정남으로서의 자아. 이 두 개의 자아 사이에서 줄타기를 즐기던 딕스는 사랑하는 여인 로렐이 자신을 떠나가자 걷잡을 수 없는 고독과 분노에 사로잡힌다. 일체의 잔혹한 묘사를 배제하고도 살인 고백의 마지막 순간까지 독자를 옭아매는 서스펜스가 일품이다.
로마 모자 미스터리, 프렌치 파우더 미스터리,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 1930년대 초반 중점적으로 발표된 엘러리 퀸의 초기작들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름들로 가득하다.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나라 이름+사건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명사+미스터리’의 작명법을 따르는 엘러리 퀸 아홉편의 장편소설은 ‘국명 시리즈’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 시리즈의 일환인 <미국 총 미스터리>는 <샴 쌍둥이 미스터리> <스페인 곶 미스터리>(두 작품 모두 출간 예정)와 더불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작품이다. 2만 명의 군중이 몰린 로데오 쇼 경기장에서 왕년의 스타 벅 혼이 말에서 떨어져 즉사한다. 그런데 벅 혼의 사인은 실족사가 아니라 총기살인이었고, 우연히 쇼를 관람하러 갔던 엘러리 퀸 부자가 수사에 뛰어들게 된다. <미국 총 미스터리>에선 상류사회에 잠입해 직접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엘러리의 행동력이 두드러진다. 결말에 이르기 전 모든 단서를 공개하며 탐정과 독자를 동일선상에 놓는 ‘독자에의 도전’ 코너도 놓치지 마시길.
초자연적 스릴러를 표방하는 <숨은 강>은 <오늘 밤 안녕을>로 대변되는 마이클 코리타의 하드보일드 세계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간다. 영화감독의 꿈을 접고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영상을 트는 것으로 생계를 연명하던 에릭은 한 여인에게 거액의 다큐멘터리 제의를 받는다. 인디애나주의 큰 재벌이었던 캠벨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제안을 받아들인 에릭은 인디애나 주의 최고급 호텔에 투숙하며 촬영을 준비하다가 이상한 환각에 시달린다. 고립된 호텔에서 서서히 광기에 물들어가는 인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숨은 강>은 <샤이닝>을 연상케 하지만 <샤이닝>에 비해 훨씬 몽환적이고 고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욕망을 억누르고 살다가 환각을 통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사람들, 그들의 허황된 욕망이 초자연적인 힘의 토네이도에 휩쓸리는 마지막 장 면의 클라이맥스에 이르고 나면 기나긴 악몽을 꾼 것 같은 느낌에 빠지게 될 거다. 이 작품을 쓴 작가의 나이가 고작 서른한살이라는 게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