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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철가방과 포니 블루스1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중국집 배달원 덕배

몇년 전 신문에서 중국집 ‘철가방’을 한국의 대표적인 디자인으로 언급한 걸 본 적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화교들이 운영하던 중국집을 중심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 배달용 통은 모양새가 투박했지만 가볍고 위생적이었고, 그 덕분에 이후 전국 중국집의 필수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세상이 살 만해지니 이런 고물들도 다 대접을 받는구나 싶으면서도, 삶에 치여 그동안 잊고 살았던 30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 시절, 나는 서울 변두리의 중국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온 지 2년 정도 지났을까?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형편에 겨우 중학교를 마치고 소작농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다가 이렇게는 도저히 못 살겠다는 생각에 새벽 기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했었다. 하지만 머리에 든 것도 없고 손에 밴 기술도 없이 맨 몸뚱이 하나로 서울에서 버티는 건 쉽지 않았다. 그저 세끼 고봉밥 먹여주고 비 새지 않는 골방에 잠만 재워주면 무조건 오케이하고 달려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서러운 서울살이 2년 동안 손에 거머쥔 것은 푼돈 몇푼뿐이었다.

그렇게 온갖 허드렛일을 전전하다가 흘러든 곳이 이제 막 개발의 기지개를 펴고 있던 강남의 어느 중국집이었다. 그전에 일했던 곳은 폐차장이었다. 거기서 맡은 일은 고물 차들을 해머로 내리치며 박살을 내는 거였다. 일년에 한번 택시를 탈까 말까 한 형편이었지만 폐차 직전의 피아트 124나 코티나 같은 자동차의 날렵한 몸매를 직접 손끝으로 더듬어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이런 자가용을 몰며 폼나게 살 것이라는 기대감에 빠져들곤 했다.

하지만 그런 단꿈도 잠시. 폐차장을 빠져나온 나를 맞이해준 것은 자전거였다. 중국집에 취직한 뒤 확실히 몸은 편해졌다. 다만 한손으로 배달통을 들고 자전거를 모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직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동네 비포장도로를 달리다보면 사거리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아이들을 피하지 못해 넘어지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땅바닥에 널브러진 음식들 값을 월급에서 물어줘야만 했다.

서울 올라와서 별 해괴한 꼴을 다 보고 살았지만, 중국집에 온 지 얼마 안돼 경험한 것보다 더 괴상망측한 것은 없었다. 고급 이층양옥이 즐비한 옆 동네로 볶음밥을 배달하러 간 날이었다. 그 집 식모가 코빼기도 안 비친 채 대문 스피커를 통해 정원 올라가는 계단에 음식을 놓고 가라고 했다. 사실 그때부터 낌새가 좀 이상하긴 했다. 그런데 그릇을 돌려받으러 갔더니 글쎄, 황소만 한 셰퍼드가 볶음밥을 먹어치운 뒤 긴 혓바닥으로 접시를 핥고 있는 게 아닌가. 더 가관은 마침 정원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 집 안주인이었다. 울긋불긋 꽃무늬 홈드레스를 입고 있던 그녀는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숨이 넘어갈 듯 깔깔대면서 “설거지 안 해도 되겠네”라고 이죽댔다. 아니, 아무리 대궐 같은 집에서 산다고 해도 그렇지, 사람이 먹을 음식을 짐승에게 먹이다니. 내 고향 같았으면, 동네 어르신들에게 천벌 받을 짓을 했다며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었을 거다. 하지만 여긴 서울이었고 그중에서도 이제 막 알부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방배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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