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학살에 관한 클로드 란츠만의 기념비적 다큐멘터리 <쇼아>가 개봉했을 때 이 영화에 가차없는 비난을 던진 건 장 뤽 고다르였다. “이 영화는 보여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고다르는 그렇게 비난했다. 고다르에게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다. 학살이 이뤄졌던 가스실의 바로 그 순간의 현장이 독일군의 영화 카메라에 찍혔으며 그것이 세상 어딘가의 기록보관소에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아우슈비츠의 기록물이라고 자처하는 <쇼아>가 그 이미지들을 보여주지도 않고 찾으려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다르는 힐난했다. 고다르는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쇼아> 옹호론자 마르그리트 뒤라스와의 논쟁도 불사했다. 훗날 한 평자는 그것이 경험적인 검토와 무관하게 그의 유죄의식에서 기인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20세기의 매체인 영화가 20세기의 가장 끔찍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해내지 못했으므로, 혹은 기록했다 하더라도 사실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에 대한 유죄의 강박관념이 작동하여 공격의 대상을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영화가 윤리적 파산을 맞은 것이라 믿었던 고다르는 “영화의 촛불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꺼졌다”고 탄식했다. 고다르 특유의 우격다짐이라 할지라도 영화의 존재론에 신중했던 태도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건 경청할 만한 우격다짐이다.
없음이 증언하는 있음
반면에 클로드 란츠만의 의견은 고다르와 달랐거니와 완벽하게 반대였다. “나는 모든 아카이브에 대항하여 <쇼아>를 만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쇼아>는 학살의 현장에 관계된 기존의 문헌 중 단 한장의 사진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생존자들과 가해자들과 주변인들을 릴레이 인터뷰하고 있으며 때로는 수용소의 인근 장소를 배회하고 그것으로 모자라다고 판단될 때는 재연도 했지만 기록화면은 쓰지 않았다. 란츠만은 설령 고다르가 말한 그러한 영상 자료들을 “내가 발견하게 된다고 해도 없애버릴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여기에는 반드시 보아야 하는 이미지와 보아서는 안되는 이미지를 사이에 둔 윤리적 쟁점의 대립이 있으나 이건 고다르와 란츠만 논쟁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글을 요구할 정도로 복잡한 사안이다. 다만 지금은 란츠만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닿기 위해 배경을 설명하는 마음으로 썼다. 란츠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흔적이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주의 환기시키는 것이 애당초 <쇼아>의 출발점이었다. 바로 그 공허로부터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쇼아란 원래 절멸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 그의 말을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다. 모든 증거가 사라져버린 그 사건의 실체를 제대로 증명할 만한 방법은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형식을 구축하는 것이며 그것만이 오로지 실존했던 역사를 말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고다르는 그 무엇이 있어야 증거가 된다고 탄식하고 란츠만은 그 무엇이 없다는 것이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란츠만이 말한 ‘공허’와 정확히 같은 의미가 되지는 않겠지만 무언가 필시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소재로 생명정치에 관한 경청할 만한 정치철학적 개념들을 내놓은 조르지오 아감벤의 생각을 경유할 수 있다. 아감벤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의 직접적인 증언에조차 공백이 깃들어 있음을 지적한다. 그의 현학적이며 복잡다단한 분석을 요약하는 건 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으니 그 생각을 능동적으로 해석한 슬라보예 지젝의 단언이 더 적절할 수는 있겠다. “아우슈비츠에 대해 직접 증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다.” 증거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절멸해버렸다는 그 사실이 현실적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엄청난 비정상적 학살이 실재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이 곧 역설적으로 증거가 되고 있다는 걸 믿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란츠만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고는 추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용산엔 없는 빨간 잉크
용산이 ‘광주’ 이후 우리 시대의 쇼아 즉 절멸처럼 보인다. 이 사건은 생명정치의 실현과 유지에 관한 상식이 송두리째 흔들린 예외적 사건이자 거대 체제에 의해 게토화되어 망루에 갇힌 ‘벌거벗은 생명들’에 관한 사건이며 그러나 그 당사자들 대부분은 살아나오지 못하고 증거는 대부분 미궁으로 빠져버린 사건이다. <두 개의 문>에 관한 지난 글들에서 김소영이 국가가 행사한 “비상사태”(예외상태)를 말하고 변성찬이 체제가 만든 “공백”에 관하여 말할 때, 나는 그들이 아우슈비츠를 설명할 때 대두된 정치철학적 개념인 예외상태와 공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미루어 짐작한다. 예외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상시적으로 벌어지는 비상사태가 여기 있고 그 결과로서 사회적 공백, 사법적 공백, 역사적 공백, 현실의 공백이 여기 남겨진 것을 그들은 지적한다. 앞선 평자들의 귀한 의견에 빚지고 도움을 얻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이 정치철학 개념의 복잡한 함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나는 그러한 배경들이 <두 개의 문>이라는 영화와 영화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소멸한 증거들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증거가 될 수 있는가. 혹은 공백은 어떻게 그 영화의 숨은 역학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나의 질문이다. 다만 어떤 비상한 개념이라도 그 개념의 엄중함이 현실의 감각적 충격보다 내게 더 가깝지는 않다. 그러니 세속적 윤리와 상식에 기대어 풀어 말하고 싶다. 예외 상태란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믿었으나 결국 일어나는 일들이 상시적으로 발생하는 상태라고 불러도 될 것이고 공백은 그런 상태로 인하여 부재나 무지나 무력감 등을 동반하는 가운데 있어야 할 것들이 사라진 상태 즉 ‘없는 상태’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두 개의 문>에는 바로 그런 상태가 기입되어 있다. 그럼 어떻게 기입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지젝이 여기저기 인용하기를 즐기는 오래된 독일식 농담 하나를 우리 식대로 지금 반복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시베리아로 일하러 가게 된 독일 노동자가 검열관의 우편물 검열을 피해 어떻게든 친구에게 그곳의 실상을 전하려고 고민한다. 그런 끝에 친구와 약속을 한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자신의 편지가 빨간 잉크로 씌여 있으면 그건 거짓말이고 파란 잉크로 씌여 있으면 진실이라고 친구와 약속한다. 마침내 그 친구에게 편지가 날아든다. 그 편지는 파란 잉크로 쓰여 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훌륭해. 가게에는 상품들이 가득하고, 음식이 풍부하며, 아파트는 크고 난방도 적절해. 영화관에서는 서양영화를 보여주고 관심을 끌 만한 아가씨도 많아. (그런데) 자네들이 얻을 수 없는 것 단 하나가 있다면 그건 빨간 잉크야.”
그 독일 노동자는 빨간 잉크를 구하지 못했거나 구할 수 있었더라도 빨간 잉크로 편지를 쓰는 대신 그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지금 이 편지의 내용이 거짓이라는) 진실을 말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 판단한 것이리라. 영화에 관한 지젝의 의견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으나 시대를 평론하는 그의 수사학은 효과적이라고 느끼는 나는 이 빨간 잉크의 일화가 용산을 다룬 <두 개의 문>의 영화적 상태를 과장되게나마 효율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란츠만이 말하는 공허, 아감벤이 말하는 공백, 용산에 관하여 우리가 느끼는 없는 상태 혹은 없는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직감되기 때문이다. 용산에 관한 영화들은 대개 빨간 잉크로 직접 쓰인다. 즉 용산 사태의 법적 모양새가 거짓임을 밝히기 위해 가장 직접적인 진실의 도구를 골라 쓴다. 이를테면 철거민 생존자의 증언을 담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개의 문>은 우리에게 지금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다. 친구, 지금 여기 용산에 없는 것은 빨간 잉크야, 라고.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용산의 법적 모양새가 실은 거짓이라는, 그 진실을 말하기 위해 여기 무엇이 없는지를 말한다. 알려진 그대로 <두 개의 문>에는 철거민 생존자의 증언이 등장하지 않고 혹은 등장하지 못한다. 대신 무엇이 없는지 말해지고 또한 구조화된다. 이 비유가 다소 과장으로 비친다 해도 나는 이 과장됨이 지금 필요하다고 느낀다.
바깥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없는 것들 혹은 없는 상태의 층위는‘용산’이라는 사건 그 자체에 이미 내장되어 있다. 이를테면 사건 당일에 부검을 명목으로 사라져버린 시신, 경찰쪽을 가해자로 두고 수사를 벌였으나 수사의 방향이 바뀌면서 사라져버린 3천쪽의 초동 수사 기록 등 김형태 변호사가 지적하고 있는 것들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이 사건에 관련하여 있어야 할 무엇이 여기 어떻게 없는지 설명하는 데 주력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구조는 알려진 것처럼 스릴러 구조가 아니라 없는 것들과 없는 상태를 의문시하는 구조라고 좀 엉뚱하게 풀어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이렇게 상상해보자. 시신이 사라지지 않아 사체 파악이 가능하고 3천쪽의 초동 수사 기록이 진작부터 밝혀졌다면 이것들의 행적을 두고 일종의 의문 구조로 이끌어가는 <두 개의 문>의 초반부는 성립 가능한 것인가.
꼭 필요한데 정작 없는 이미지도 있다. 2차 화재 발생과 연루된 경찰의 중요 채증영상이다. 경찰쪽의 말을 믿자면 이건 원래 찍히지 않았던 것이고 농성자 변호인단의 말에 기대자면 이건 찍었으나 없어졌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현실적으로 엄연한 공란이며 제약이다.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두 부류다. 그 안에서 잡혀갔거나 죽은 사람들, 이 사람들만 진실을 보았을 것이다.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유일한 끈은 영상이다. 감사한 일이기는 하지만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가 가질 게 너무 없다는 무력함의 증거이기도 했다”고 박진 활동가는 말한다. 그가 말하는 감사하지만 무력한 영상은 칼라TV, 사자후TV, 경찰의 채증영상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의 입장에서 그것들은 다양한 화법의 가장 기초적인 요건들이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들이 영화적으로 보자면, 전부 이 이미지에 대한 해설자들이라는 사실도 이때 중요하다.
물론 다양해지는 화법의 과정 속에서 실패한 것도 있어 보인다. <두 개의 문>의 영화 형식 자체에 관한 한 가장 꼼꼼하게 들여다본 건 <프레시안>에 글을 쓴 이동연(문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인 것 같다. 그의 생각에 대체로 공감하지만,‘인터-픽션’이라는 개념으로 이 영화의 재연을 칭찬하는 부분에는 좀 다른 의견을 덧붙이고 싶다. 우선 재연은 일반적으로 보통의 시사 프로그램에서뿐 아니라 연예뉴스 프로그램에서도 흔히 쓰이므로 그 자체로 특별하지 않다(손문권 프로듀서 유가족과 임성한 작가쪽의 법정 공방을 보도하던 중, 한 연예뉴스 프로그램은 임성한 작가쪽의 변호사의 부탁으로 그를 모자이크 처리하고 목소리를 연기로 재연했다). 재연은 어떤 효과를 가져 오는 것인가. 재연이야말로 무언가 없는 상태를 적극적으로 메우는 화법이 아닌가,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메우고 덧붙인다는 그 효과가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재연으로 공백을 보충하는 순간 본래 그 개인의 개별성은 지워지고 식별 불가능한 상태로 이끌릴 뿐만 아니라 보는 우리로 하여금 보편적이며 불특정한 상태로 그 대상을 느끼게 한다. 소재에 따라 재연은 대상을 무디게 한다. 재연된 주체의 개별적 육화는 사라지고 그래서 우린 종종 긴장감을 잃는다. 서술상 필요했겠지만, 그럼에도 <두 개의 문>에서 경찰 특공대의 재연 장면은 가장 안이한 부분으로 남는다. <두 개의 문>의 다양한 화법은 대개 공백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그 공백을 드러내는 구조로서 활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이때 지적할 수밖에 없다.
재연보다 더 나은 다른 방식을 추천하기란 어렵지만 이것보다 더 나은 방식이 지금 영화 속에 이미 많다는 사실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특공대원들의 서면 진술서를 클로즈업한 것과 육성을 녹취한 것의 효과는 재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생생하며 또 독창적이다. 특공대원들이 쓴 진술서는 활자를 크게 잡은 것에 불과하지만 그 행간에는 심리적 침묵이 있다. 그렇다면 육성은 더할 것이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 같은가, 라는 검사의 질문에 “농성자에게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하기까지 그 특공대원이 지켰던 몇초간의 침묵을 변성찬은 이미 지적했다. 인물의 증언 속에 자리한 침묵이다. 게다가 법정에서의 진술을 녹취한 그 장면에는 그의 얼굴이 등장하지 않으므로 여기엔 목소리가 있지만 표정이 없다. 란츠만은 육성 증언을 기반으로 한 자신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얼굴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두 개의 문>은 그 특공대원의 얼굴을 보여줄 수 없고 그 때문에 영화에는 새로운 긴장이 흐른다. 게다가 재판과정의 육성이 들려올 때 거기 사람의 표정 대신 망루의 농성자들이나 특공대원들의 당시 모습을 흐릿하고 음침한 흑백장면들로 처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투명한 이 사태에 대한 탁월한 선택이다. 한편 법정의 육성 진술 중에서도 피고인(농성자)으로 참여한 이들의 진술을 영화가 넣지 않았음을 우린 인식해야 할 것이다. 2009년 11월21일 용산참사재판 피고인 최후 진술에서 이충연씨는 “제가 바라는 세상은 더불어 사는 세상입니다. 역사에 남을 정의로운 판단을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영화는 그 내용을 넣지 않고 있다. 전략적 편집의 선택이 수행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게 하여 <두 개의 문>은 처음 시작했던 장면으로 다시 돌아온다. 영화의 도입부에 잠시 등장했던 2차 화재 장면은 결말부에 다시 등장하여 “화재 발생 2분 전”이라는 자막과 함께 말 그대로 2분간의 지속시간을 버틴다. 여기에는 눈을 찌르고 들어오는 끔찍한 장면들이 있다. 화면상으로 망루 왼쪽에 놓인 창문으로 사람이 들락거리는 장면과 화면상 정면으로 무언가 불길에 닿으면 안되는 것들이 밖으로 던져지는 장면을 볼 때, 이 영화의 정점에 놓인 이 장면은 처음 볼 때와 좀 다른 강도로 느껴진다. 이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장면은 최후의 호소로서 강력해진다. 우리가 이 장면을 보는 경험은, 지금 무엇인가를 놓치지 않고 보고 있지만 지금 저 안의 무엇은 보지 끝내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것인 동시에, 그 때문에 지금 이 사태를 일으킨 거대한 바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새삼 직감하게 되는 경험이다. 보고 있으나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미지, 시각적 증거이나 인식론적 공백인 이 이미지가 영화의 정점이 되면서 결국 ‘용산’이라는 사태의 그 바깥에 놓인 체제를 우린 생각하게 된다.
무언가‘없는 상태의 구조화’ 혹은 ‘공백의 구조화’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므로 <두 개의 문>의 성취는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은 것, 농성자와 특공대 혹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원적인 대립 구조를 벗어난 역설이라는 관점에 놓인 것이 아니다. 그걸 가능하게 한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얼마나 예외상태의 상황이었는지를 밝히는 것, 즉 예외 적으로 가해자들조차 공포에 싸여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며 그 점을 위해 증거의 공백을 받아들인 다음 그 공백을 역으로 형식으로 구조화하고 화법화한다는 사실에 있다. 영화의 첫머리에 등장하는“경찰 진술과 증거 동영상을 바탕으로 용산참사와 재판 과정을 재구성한 것”이라는 머리말은 그렇게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두 개의 문>은 애당초 두 감독이 말했던 것처럼 국민참여재판의 상연이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실은 공공연한 증거물, 법질서보다 중요한 윤리적 질서의 회복을 요구하는 윤리적 증거물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러니 ‘증거가 없음을 증거하기 위한 증거가 되기’라는 동어반복의 구조가 이 영화의 운명이며 다음과 같은 문장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이 이 영화의 운명이다.“법의 유일한 목표는 판결이며 그것은 진실과 정의와는 무관한 것이다. (조르지오 아감벤)”
윤리로만 접근 가능한 영화 앞에서의 두려움
<두 개의 문>을 보고 나면 국가의 폭력이 문제라고 입을 모아 말하게 된다. 한치도 틀리지 않은 말이다. 다만 이 영화의 영화적 전략을 통과하고 나면 국가폭력이 문제다, 라고 단지 되풀이하는 것은 조금 힘 빠지는 일이라고 느끼게 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 “수용소에서 저질러진 끔찍한 일들과 관련해 제기되어야 할 정확한 질문은, 어떻게 이토록 잔인한 범죄들이 인류를 대상으로 자행될 수 있었는가라는 위선적인 질문이 아니다. 인간존재로서의 권리와 특권들을 어쩌면 그토록 완벽하게 박탈했는지, 그들에게 자행된 어떤 짓도 더이상 위법이 아닌 것처럼 (그러니까 사실상 모든 것이 정말로 가능해지게) 보이도록 만든 법적 절차와 권력 장치들을 주의 깊게 탐구하는 것이 보다 정직하며 또 무엇보다도 보다 유용할 것이다”라는 말이 <두 개의 문>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명한 정치철학자 아감벤은 그렇게 말했지만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나는 그저 그 말을 받아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두 개의 문>이라는 영화는 인간존재로서의 권리와 특권들을 완벽하게 박탈하고 자행된 어떤 짓도 더이상 위법이 아닌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 법적 절차와 권력장치들을 어떻게 주의 깊게 영화적으로 탐구했는가, 하고. 이 영화가 한국 다큐멘터리사에 획을 긋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망설여진다. 다만 여기 용산에 빨간 잉크가 없다고 말하려고 애쓴 이 영화는 능숙하게 그걸 말한 다음 그 법적 절차와 권력장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남기고 있다. 하나의 일화로 그걸 정리하는 게 좋겠다. 그러니까 지젝이 소개한 일화로 시작했으니 다시 지젝이 소개한 일화로 그 생각을 정리해도 되겠다. <폭력이란 무엇인가>의 첫장에 있는 우화다. “물건을 훔쳐낸다는 의심을 받던 일꾼이 한명 있었다. 매일 저녁, 일꾼이 공장을 나설 때면 그가 밀고 가는 손수레는 샅샅이 검사를 받았다. 경비원들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손수레는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결국 진상이 밝혀졌다. 일꾼이 훔친 것은 다름 아닌 손수레 그 자체였던 것이다”<두 개의 문>은 손수레가 비어 있다는 걸 충분히 알렸다. 그리고 손수레가 비었으니 거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빈 손수레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었음을 충분히 알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작품이 됐다.
객관적 폭력 그 중에서도 구조적 폭력이라고 불릴 만한 그 빈 손수레가 <두 개의 문>이 겨냥하고 있는 국가 폭력의 실체다. 버튼 하나로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폭력, 전화 한 통화로 수명의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는 폭력. 두 개의 문이 조준하고 있는 폭력의 진상은 실은 눈앞에서 행해지고 있는 국가의 주관적 폭력이 아니라 그 안존하고 평안한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상위적 국가의 구조적 폭력이다. 이 영화는 그 실체가 누구인가 하는 점을 빨간 잉크의 화법으로 말하는 것이다. 빨간 잉크로 빈 수레와 그 도둑을 말하는 것이다. 적어도 현장의 특공대장은 물로는 소화할 수 없다고 다급하게 말하지만 지휘본부의 무전기 넘어 목소리는 사법처리 할 수 있도록 증거를 채집하라고 평온하게 말한다. 그 상위의 체계는 더 평온하게 말할 것이다. 국가폭력이 어떻게 예외상태를 자기의 것으로 권능화하고 동시에 공백을 법적으로 유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바로 <두개의 문>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건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말은 너무 유명하다. 그리고 아우슈비츠 이후에 영화의 촛불이 꺼졌다고 탄식한 고다르의 생각은 이미 전했다. ‘용산’ 이후에도 무언가는 야만이며 무언가는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나는 이들의 과장된 절절함을 흉내내어 용산 이후에 무엇이 야만이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당장에 선언하고 싶지 않다. 용산 이후에 어떤 예술적 행위가 야만이 될 것인지 혹은 무엇이 불가능한 것인지 나는 선언할 위치에 있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다만 미학이라는 범주로 말하는 게 불가능한 창작물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을 뿐이다. 적어도 이 영화를 생각하며 오로지 윤리를 통할 수는 있으나 미의 기쁨을 말하는 건 불가능한 어떤 창작물을 대할 때의 괴로움을 실감했다. 어떤 형식을 통해 윤리를 말할 수는 있으나 그 형식을 통해 아름다움을 말할 수는 없는 운명의 영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사람이 여기 있어요라고 말했는데도 거기서 사람이 타죽은 사건을 지금 이 영화는 다루고 있지 않은가. 미학을 말하는 것이 봉쇄되고 윤리학으로만 접근 가능한 영화의 출몰은 실은 두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 지금이 예외 중의 예외 상태이며 공백 중의 공백 시대라는 걸 그런 고통으로 어렴풋하게 감지하기 때문이다. 실은, 아름다운 것들과 더 오래 많이 살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