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명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Republic of Bosnia and Herzegovina)인 보스니아는, 사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 그러다 1992년 밀로셰비치가 이끄는 보수세력이 장악한 세르비아가 정치적인 이유로 보스니아 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선언하면서 세계인들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그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정치적·인종적 갈등이 내전으로 치달으면서, 보스니아는 일약 세계의 화약고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리곤 결국 ‘보스니아’ 하면 ‘내전’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정도로, 20세기 말의 대표적인 분쟁지역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그러한 악명은 1992년 세르비아가 보스니아 영토의 70%를 점령하고 비세르비아계 주민들을 몰아내면서 저지른 이른바 ‘인종청소’가 알려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구유고연방의 각 공화국의 과격파들이 내전에 개입해 복수차원에서 ‘역인종청소’를 저지르면서, 그러한 악명은 전세계인들의 분노로 바뀌어갔다.
그러다 보스니아 내전이 어느 정도 종식된 것은 강대국들의 개입으로 1995년 10월 데이톤 평화협정이 체결된 이후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몇년간을 전세계인들의 관심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스니아 혹은 옛 유고연방의 내전을 다룬 할리우드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드림웍스의 창립작품이었던 <피스메이커> 정도가 보스니아 내전을 간접적으로 그리고 있을 뿐이다. 영화에서 보스니아 출신의 듀산은 자신의 아내와 딸을 앗아간 내전과 그 내전을 방조한 평화유지군에 증오를 품고 테러리스트가 된 것으로 나온다. 비록 러시아의 핵무기를 가지고 뉴욕에 잠입한 악한이지만,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아픈 가족사를 통해 관객은 간접적으로나마 내전의 아픔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개봉된 <에너미 라인스>는 실로 오랜만에 보스니아 내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할리우드영화라고 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이 영화의 스토리라인이 실제 있었던 사건을 초안으로 삼아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영화에 영감을 불어넣은 이야기는 보스니아 내전이 종식되기 직전이던 1995년 6월2일, 미 공군 대위인 스콧 오그레이디가 F-16기를 몰고 48번째 보스니아 상공 비행을 나가면서 시작된다. 베테랑 조종사였던 오그레이디 대위를 훗날 영화 속의 인물이 되게 한 사건은 그가 세르비아 점령지역으로 비행해 들어가는 순간 일어났다. 지상에서 세르비아 군대가 발포한 지대공 미사일 두발이 그의 F-16을 따라오고 있었던 것. 그중 한발은 무사히 피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발은 F-16 정중앙에 맞았고, 그는 비상탈출을 감행해 약 8km 정도 떨어진 곳에 내렸다.
문제는 그가 떨어진 곳이 세르비아 점령지역이었던 데다가, 그의 F-16이 격추되는 장면을 많은 세르비아 군인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땅에 닿자마자 그는 약 2천m를 달려 숲 속에 숨었고, 다행히 세르비아 군인들에 발각되지 않았다. 문제는 자신의 격추사실을 아는 미군이 자신을 구출하러 올 수 있는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떨어진 지점에서 그리 멀리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는 6일동안 단 두번만 가까운 곳으로 장소를 바꾸며 구출팀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6일 동안 그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었는데, 훗날 그는 6일간 개미를 먹고 물 대신 양말에 고인 땀을 마시며 생존했다는 사실을 밝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게 5일이 지난 6월8일, 오그레이디 대위를 수색하던 수색기 한대가 남은 연료를 소진하기 위해 일부러 세르비아 지역의 상공에 조금 더 오래 채공하다가 우연히 오그레이디 대위가 보내는 신호음을 포착하면서 그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문제는 그 신호를 들은 것은 동트기 약 1시간 전이었다는 사실. 좀더 확실하고 안전하게 그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미국만의 첨단 장비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가 져서 어두워질 때까지 18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결국 미군은 오그레이디의 안전을 더이상 외면할 수 없다고 판단, 즉각적으로 구출팀을 보냈고, 다행히 별다른 교전없이 적진 한가운데서(Behind Enemy Lines) 그를 무사히 구출해냈다. 그렇게 6일간을 적진에 있었던 그의 귀환은 이내 전세계적인 뉴스가 되었고, 심지어 그가 미국에 돌아왔을 때는 클린턴이 직접 주재한 환영식이 펼쳐지기도 했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공포를 경험하고 귀환함으로써 미국인들 사이에서 영웅이 된 그는 자신이 구출된 지 3년이 지난 1998년 6월8일 전역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쓴 <Return with Honor>, <Basher 5-2>(그가 사용했던 무선호출 암호) 등을 출간해 베스트셀러로 만든 뒤, 지금은 각종 사회단체와 대학 등을 돌며 강연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한 강연회장에 나타난 그에게 <에너미 라인스>를 봤냐는 질문이 던져진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그건 내 이야기가 아니다. 즐겁게 보긴 했지만 적진에 떨어진 조종사가 겪게 되는 일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라고 보기엔 어렵다”라며 영화와 자신을 연결시키려는 시각을 부인했다.
물론 아무리 실화에 근거했다고 하더라도, 할리우드 액션영화일 수밖에 없는 <에너미 라인스>가 오그레이디 대위의 경험과 똑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연사로 활동하며 누누이 강조하고 다니는 극한에 몰린 인간으로서 느끼게 되는 전쟁에 대한 회의와 삶에 대한 애착이, 영화 속에서 어느 정도 잘 드러나고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비록 영화 전체가 게임CF를 찍던 감독의 작품답게 전형적인 미국식 영웅이야기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철민/인터넷 칼럼리스트chulmin@hipop.com
<에너미 라인스> 공식 홈페이지 http://www.behindenemylinesmovie.com/
스콧 오그레이디 대위 홈페이지 http://www.allstar.fiu.edu/aero/OGrady.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