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6일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1945년 8월15일도 아니고 1950년 6월25일도 아닌 애매한 숫자 1949년 6월6일…. 솔직히 나 역시 오랫동안 그랬다. 지금 제작 중인 다큐멘터리가 아니었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1949.6.6’이란 날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가제는 ‘독립 유공자 후손들’이다. 자료조사를 하던 중 자연스럽게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자제분을 만나게 됐다. 아마 김상덕이란 이름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상당히 낯설지 않을까 싶은데, 임시정부에서 문화부장(장관급)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다. 김구 선생과 중국 땅에서 풍찬노숙하며 자신의 삶을 오롯이 독립운동에 바쳤던 분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무슨 전래동화같이 느껴질 테니 좀 다르게 말해보자.
김상덕은 청년 시절 도쿄 유학생 신분으로 (교과서에 나오는)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주역 중 한명이다(참여자 중 한명이었던, 하지만 훗날 친일의 길을 걷는 인물로 우리가 잘 아는 이광수가 있다). 1년여의 수감 생활 뒤 중국으로 간 그는 무려 10년이 지나서야 홑몸으로 중국 땅까지 찾아온 아내와 상봉한다. 그러나 몇년 뒤 아내는 약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막내조차 영양실조(추정)로 잃게 된다.
막내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는 결국 남아 있는 아들과 딸을 고아원에 맡기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몇년이 지나 다시 자식들을 찾은 그는 해방 뒤 그토록 그리던 고국에 돌아와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러나 집까지 찾아와 자신을 회유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를 뿌리친 뒤 얼마 안돼 반민특위 사무실로 경찰들이 들이닥친다. 그날의 습격으로 반민특위는 사실상 와해되고, 친일 청산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맞다. 제헌의회가 법률로 정한 헌법기관인 반민족행위처벌특별법에 근거한 위원회, 일명 반민특위(反民特委)가 친일 출신이 주류를 이룬 경찰들에 습격당한 날, 그날이 바로 1949년 6월6일이다.
그러나 여기가 끝이 아니다. 다음해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말을 믿고 서울에 남아 있던 그는 결국 납북되고 만다. 아들 김정륙 선생은 검정색 지프차에 태워지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아직까지 또렷이 기억한다. “내가 그 이후로 주눅들어 살아 목소리가 작아요.” 연좌제에 묶이고 가난에 치이며 세상에 주눅 들어 살았던 아들의 나이가 어느덧 70대 후반이다.
김상덕이란 이름을 트윗에 올렸더니 한 트친께서 <무한도전>의 한 에피소드였던 ‘김상덕 찾기’가 떠올랐다는 답을 주셨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함께 웃으면서 함께 씁쓸했다. 그리고 문득 물어보고 싶어졌다. 한·일군사협정을 맺은 분들은 혹시 김상덕이란 이름을 알고 있는지 말이다. 아니면 적어도 1949년 6월6일은 알고 있는지….
일제 강점기 시절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낮춰 불렀던 말이 ‘차우셴 왕궈누’(朝鮮亡國奴)라고 한다. 그 말을 한 중국 아이에게 자신도 모르게 욱해서 돌멩이를 던졌다던, 그래서 선생님한테 혼나 펑펑 울었다고 말하던 김정륙 선생님의 수줍은 표정이 문득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