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얼마 전까지 방영된 올리브 채널의 푸드 에세이 <이하늬의 비건 레시피>도 그중 하나였다. 물론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하늬가 진행한 그 프로그램을 유심히 본 까닭은 내가 아는 이하늬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이다. <불굴의 며느리>(2011), <불후의 명작>(2012) 등 드라마에서 그는 대체로 당차고, 자기주장이 강한 도시 여자였다. 반면, 요리 프로그램 속 그는 어찌나 상냥하고 친절한지. 몇번 연습을 해본 듯한 조리 실력이며, 누구나 들어도 쉽게 이해가 되는 멘트며, 재료를 꼼꼼하게 손질하는 태도며, 방송 속 그는 정말 요리를 사랑하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라면 자신이 맡은 캐릭터도 진정 아끼고 사랑할 줄 알 것이다. 살인기생충을 소재로 다룬 재난영화 <연가시>에서 끊임없이 정부 시스템에 항의하는 국립보건원 연구원 연주를 맡은 이하늬를 만났다. 영화 데뷔작 <히트>(2011)에 이은 두 번째 영화 출연작이다.
-뉴욕 여행을 하던 중 벌에 쏘였다고. 영화 홍보를 앞두고 속상했겠다. =깜짝 놀랐다. <연가시> 걱정부터 되더라. 가장 중요한 제작 보고회도 못 가고. 일부러 안 간 게 아니냐는 이상한 오해도 생기고. 영화를 알려야 하는데 안 나갈 이유가 없잖나.
-채식주의자인 당신이 2년 전 출연했던 방송에서 고기를 먹었니, 안 먹었니 하는 이상한 논쟁도 나오던 차다. =2010년 방영된 올리브 채널의 프로그램 <She’s O’live-이하늬의 My Sweet Canada>를 두고 나온 얘기다. 고기를 먹었냐, 안 먹었냐라고 물어본다면 안 먹었다. 프로그램 제작에 협조를 해준 캐나다 축산협회에서 고기를 먹는 장면을 넣어달라고 해서 찍은 건데, 입안에 넣는 장면을 촬영한 뒤 바로 뱉었다. 고기를 맛있게 먹는 모습은 편집을 통해 연출된 거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일일이 해명할 필요가 있을까. =(이)효리 언니가 방송에서 채식에 대한 개념을 전하면서 채식이 트렌디하게 알려졌지만, 예전에는 채식주의자라고 밝히면 ‘자기네들이 그렇게 잘났어?’와 같은 시선이 존재했다. 그때는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을 숨길 필요도, 밝힐 필요도 없었다. 잘못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게 예의이고. 먹었건 안 먹었건 중요한 건 나의 신념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다.
-영화 얘기부터 해야 했는데. <연가시>는 봤나. =보는 내내 심장이 많이 뛰었다. 배우들끼리 그랬다. “야, 생각보다 훨씬 잘 나오지 않았냐?” (웃음)
-큰 기대를 안 했나보다. (웃음) 어떤 생각을 했기에 그런가. =혼자서 따로 찍은 장면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현장에서 다른 배우들이 찍은 장면이 궁금했거든. 게다가 재난영화라 CG도 중요했고. 결과물을 보니까 숨이 찰 정도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있더라. 우리 영화가 재미있다, 없다 같은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어도 절대 잘 수는 없는 영화다. 안 그런가?
-지루하진 않더라. 시나리오도 그렇게 읽었을 것 같다. =첫장부터 후루룩 넘어갈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어떤 시나리오는 읽다가 덮어놓고 다른 거 할 때가 더러 있는데.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박정우 감독님이 꼭 찍어서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중간에 다른 배우로 교체됐다가 다시 합류했다.
-시나리오를 통해 만난 연주는 어떤 여자던가. =전문직 여성답게 지적인 여자. 불의를 봤을 때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여자. 한마디로 모두가 “예” 할 때 혼자서 “아니요” 할 수 있는 여자.
-드라마 <불굴의 며느리> <불후의 명작> 등 여러 작품에서 맡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언제나 당당한 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만날 입버릇처럼 하는 얘기가 있다. “내 이미지가 왜곡됐어.” (웃음) (실제로는 어떤가라는 질문을 던지자) 지적이고 당당할 것 같지만 털털하고 무언가를 흘리고 다니는 등 허점이 많은 여자? 그렇다고 외모로부터 느껴지는 1차적인 이미지는 거부하기 힘든 것 같다. 배우니까.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한다. 실제 이하늬와 멀리 떨어진 캐릭터로부터 시작했지만 지금은 조금씩 실제와 가까운 캐릭터를 만나고 있다고.
-연주의 약혼 상대가 노숙을 밥먹듯이 하는 형사 재필(김동완)인 게 납득이 잘 안 가더라. =그러니까. 관객이 연주가 재필을 사랑하는 모습을 봤을 때 의아해할까봐 고민을 많이 했다. 그래서 찾은 이유가 모성애였다. ‘내가 아니면 누가 널 건사하겠니’ 같은 느낌의 연인이랄까. (김)동완 오빠를 처음 봤을 때 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실제 연애 스타일이 궁금하다. =한 남자만 바라보는 스타일이다. 착한 여자 스타일이라 그런지 항상 나쁜 남자를 만나는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 퍼주고. 그래야 후회가 없으니까. 이것 재고 저것 재는 사람은 나중에 미련이 많이 남더라.
-<연가시> 속 연주는 국가 시스템에 끊임없이 저항하며 이야기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인물이다. =연기할 때도 늘 긴장감을 유지해야 했다. 한톤만 낮아져도 이야기의 긴장감은 무너질 수 있다. 호흡의 문제니까 슛 들어가기 전에 뛰기도 많이 뛰었다. 찍을 장면 전후로 배치된 장면 속 긴장감과 연결하는 것도 중요했고. 그래서 에너지를 무작정 분출하기보다 촬영 내내 앞뒤 장면을 항상 염두에 뒀다.
-2006년 미스코리아로 데뷔한 이후 약 6년이 지났지만 출연작은 그리 많지 않다. =데뷔한 뒤 들어간 회사가 뮤지컬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공연부터 하고 싶었다. 막상 들어갔는데 생각했던 것과 다르더라. 배우로서 준비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2009년 뉴욕으로 떠났다. 한 작품을 끝낸 뒤 캐릭터에서 벗어나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자 하는 배우들이 주로 다니는 HBO 스튜디오에 갔다. 그곳에서 시나리오 분석, 뮤지컬 노래 연습 등 연기와 관련한 기본적인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일단 어떤 작품에 출연해 배우면서 일했던 여느 배우와 다른 길을 갔던 거다. 덕분에 나를 채울 수 있는 시간을 보냈고,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조급하진 않나. =사실 급하다. 어린 나이도 아니고. 그러나 조급해하진 않는다. 조급해지면, 좋은 배우가 되는 건 힘들다. 쓸데없는 일이잖나. 그저 옳고 정직하게 한 작품씩 쌓아가다 보면 좋은 작품이나 캐릭터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분명한 건 지금은 열심히 달려야 할 때라는 것. 일을 막 시작한 것처럼 설렌다. 보는 분들도 설레야 할 텐데. (웃음)
-요리 프로그램 보는 걸 좋아한다. 얼마 전까지 방영된 <이하늬의 비건 레시피>나 <이효리의 소셜 클럽 골든12>를 재미있게 봤다. 어쩜 그렇게 요리를 잘하나. 그걸 보기 전까지는 그저 도도하고 까탈스러운 여자인 줄로만 알았다. =정말 재미있게 했다. 레시피도 직접 고민하고 결정하고. 요리 촬영하기 하루나 이틀 전, 집에서 연습해본다. 촬영 당일에 능숙하게 보이려면 몇번 해봐야 가능하다. 멘트도 미리 생각하고. 요리라는 게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면 답이 안 나올 수 있으니까.
-언제부터 요리를 시작했나. =드라마 <파스타> 때다. 요리 코디네이터를 맡은 선생님과 인연이 닿아 요리를 배울 수 있었다. 다른 요리사를 찾아가 따로 배우기도 했고. 요즘은 한식이 매력적이라 조금씩 배우고 있다. 지금은 순전히 재미있어서 요리를 하는데, 나중에 가정을 꾸리게 되면 재미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의무가 되는 거잖아. 그게 조금 걱정이긴 한데….
-의무도 의무 나름이다. 그렇다면 요리에 비유해보자. <연가시>는 배우 이하늬라는 레시피 중 어떤 과정에 해당할까. =완전 처음이니까 면 삶는 단계? 아이덴티티를 잘 삶아야 좋은 요리가 나오니까. (웃음) 앞으로 스파이시 칠리 크림 바닷가재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 일단 내가 바닷가재를 좋아하고. 구하기 힘든 재료잖나. 매콤한 칠리 소스와 부드럽고 고소한 크림 소스가 섞인 오묘한 맛이 있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천진난만하다가도 또 때로는 악랄하거나 섹시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무언가로 규정되지 않고 계속 변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차기작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맡은 수연은 어떤 여자인가. =주지훈씨가 충녕과 덕칠 1인2역을 맡았는데, 그중 덕칠이가 좋아하는 양반집 규수다. 지조있고 당차고 똑 부러지고 할 말 다 하는 여자다.
-또 할 말 다 하는 여자네. =그러니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