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자> 9회. 용식이(조재윤)가 조 형사(박효주)에게 물었다. “근디요 조 형사님은 백 형사님(손현주)과 뭔 사이다요? 아 긍께 이게 쉬운 일은 아니지라. 탈옥을 하는데 잘못 도왔다가 커플로 쇠고랑 찰 수도 있는디.” 조 형사는 자신이 이혼을 할 때마다 대신해서 짐을 챙겨다주고 도망간 남편을 잡아다 때려주면서도 한번도 혼낸 적이 없던 백홍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도 우리 선배님 편이 돼주는 거다.” 조 형사의 고백에서 뜻밖에도 17년 전, 손현주가 출연했던 <모래시계>가 떠올랐다. <모래시계>에서 손현주는 태수의 탈옥을 돕던 조력자였다. 태수는 동생들이 준비한 컨테이너 안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탈출했다. 손현주는 빈 컨테이너로 경찰을 따돌렸다. 결국 그들을 잡은 경찰이 “박태수는 어딨냐”고 다그치자, 그는 함께 잡힌 동료에게 말했다. “들었니? 형님 무사하시단다.” 어쩌면 손현주라는 배우가 연기할 수 있는 과잉된 남성성은 그 정도였을지 모른다. 지난 약 20년간 캐릭터에 인간미를 담아온 그에게는 정과 의리를 다해 누군가를 진심으로 돕는 남자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하지만 손현주는 지금 누군가의 진심어린 도움을 받아 필사의 탈주를 벌이고 있는 백홍석을 연기하고 있다. 시청자 또한 백홍석의 분노에 아파하고, 그의 눈물에 슬퍼하고, 그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답답해하며 그와 함께 폭주하는 중이다. 적어도 <추적자>를 보는 사람들에게 손현주는 <모래시계>의 최민수나 다름없는 남자배우일 것이다
<추적자>의 이야기는 딸을 잃은 아버지가 제 성질을 못 이겨 저지르는 무리수들의 연대기다. 강동윤(김상중)은 백홍석의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말한다. “수술만 성공하지 않았어도, 니가 PK준(이용우)만 안 잡았어도, 법정에서 죽이지만 않았어도, 탈옥만 안 했어도!” 못된 말이지만,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딸을 죽인 진범을 찾으려던 아버지의 싸움은 결국 딸을 원조교제와 약물중독에 빠진 여학생으로 만들고, 우울증에 걸린 아내를 혼자 둬 죽게 하고, 자신은 살인자가 되고 만다.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한번 눈이 멀면 앞으로 돌진하는 남자. 좋게 말해 순수하고, 사실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남자. 9회에서 백홍석이 강동윤을 쏘지 못한 것도 결국 같은 맥락으로 설명된다. 백홍석이 쏘지 못할 총을 겨눈 덕분에 외려 강동윤은 반등의 기회를 얻는다. 손현주는 백홍석의 그런 선택을 잠시의 무표정만으로 설득시킨다. 아이돌 스타도 없는 데다 평범한 40대의 소시민 남자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방영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 ‘운’이라고 해도, 손현주가 백홍석을 맡게 된 것이 운으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많은 40대 남자배우가 있고, 그들 모두 누군가의 아빠와 남편을 연기한다. 하지만 손현주만큼 소시민의 감정을 공감해온 역사가 길고 명확한 남자배우는 많지 않아 보인다(만약 중년이 아닌 노년의 남자가 주인공이었다면 당연히 주현이나 박인환 같은 배우를 떠올렸을 것이다).
어리숙하지만 정이 넘치고 미워할 수 없는
손현주의 지난 인터뷰를 읽어보면 그가 옛날부터 ‘사람’과 ‘냄새’란 키워드를 즐겨 써왔다는 걸 알 수 있다. 드라마 <형>(1992)에 출연했을 당시 그는 <경향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앞으로 고향 냄새가 물씬 나는 토속적인 연기를 펼쳐 보이는 게 연기자로서의 꿈”이라고 말했다. <첫사랑>(1996)에서 주정남을 연기했을 때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주위를 빙빙 맴돌다 결국 떠나보내고 마는 순정파 역을 해보고 싶다. 서민 냄새 풍기는 진솔한 연기자가 되는 게 꿈이다.”(<한겨레>) 연기의 모토를 ‘토속’과 ‘서민’으로 삼았던 손현주는 그의 말처럼 이후 약 20년간 어수룩하지만 정이 넘치고, 갖가지 욕심을 품지만 미워하기 힘든 남자의 잔상을 남겨왔다. 전자의 남자들은 <솔약국집 남자들>(2009)의 노총각 진풍이나, <조강지처 클럽>(2007)에서 구세주(이상우)와 함께 몇 안되는 ‘좋은 남자’였던 길억, 자신의 과오를 반성한 뒤 아내에게 모든 걸 다 바치려 했던 <장밋빛 인생>(2005)의 반성문 등이다. 자신의 아내와 바람을 피운 남자의 아내인 복수와 동병상련의 처지로 만나 결혼에 골인하기까지 길억이 보여주는 사랑은 연하남과의 로맨스 못지않은 판타지였다. 반성문이 아픈 아내를 웃게 해주겠다고 내복 바람으로 춤을 추면서 웃고 울었던 장면 또한 손현주로 인해 <장밋빛 인생>의 가장 강렬한 명장면이 됐다. <해피투게더>(1999)의 박하도 그들의 연장선에 놓인 남자일 것이다. 박하는 상황 판단이 느리고 말을 더듬는 버릇 때문에 친구인 태풍(이병헌)에게 구박받지만, 그의 착한 심성은 극중에서 찬주(조민수)가 울 때마다 그녀를 위로했다. 딸의 생일잔치와 연애까지 살뜰히 챙기던 백홍석이 딸의 죽음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에서 어딘가 연인을 잃은 남자의 느낌이 엿보인다면, 그 또한 손현주가 연기했던 헌신적인 연인의 역사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작품에서 따뜻한 연인, 아빠, 남편을 연기했지만 사실 우리에게 더 깊게 각인된 손현주의 잔상은 그다지 모범적이지 않은 남편들의 얼굴이다. 불치병에 걸린 아내에게 헌신했던 <용띠 개띠>(2001), 입양한 아이를 키우는 데 전념했던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2006) 같은 특집극이 있었지만, 드라마의 소재와 형식상 손현주는 <앞집 여자>(2003)와 <장밋빛 인생> 같은 미니시리즈에서 그가 줄곧 말해온 서민 냄새를 더욱 진동시켰다. 개인적으로는 언제나 손현주의 최고작으로 <앞집 여자>를 꼽아왔다. 딱 두 장면에서 보여준 행동과 표정 때문이었다. 바람 피우던 남자는 아내에게 덜미를 잡힌 뒤, 사죄의 편지를 쓴다.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적어내려가던 그는 두줄을 채 못 채우고 종이를 찢어버린다. 쓰고 찢기를 반복하던 그는 결국 잠이 들어버린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몸을 뒤척이며 단잠에 빠진 그의 모습을 보고 리얼의 극치라 생각했었다. 관습적으로는 아내에게 뻔뻔하게 굴거나, 이혼하자고 윽박지르거나, 성질을 부리고 집을 나가는 게 맞는 수순일 것이다. 하지만 손현주는 그 장면에서 잘못했으니 반성은 하는데, 그렇다고 굳이 또 뭔가 행동하기는 귀찮은 남자의 무기력한 기질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또 다른 장면은 이미 헤어진 아내에게 단추가 달랑거리는 와이셔츠를 벗어줄 때였다. 그가 와이셔츠를 벗자 늘어난 러닝과 반바지, 검은 양말과 운동화 차림의 초라한 초상이 드러났다. 속상한 아내가 “그애는 이런 것도 안 해주니?”라고 묻자, 남자가 말한다. “시집갔어. 지난달에….” 손현주의 옷차림과 기운없는 표정이 찌질함의 정수로 보였고, 약 20년 뒤 내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어 두려웠다. 미운 남편인 동시에 불쌍한 남자, 그래서 미움보다는 짠한 마음이 앞서는 손현주의 남자들은 이미 <앞집 여자>에서 완성됐을 것이다.
그의 분투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유
어쩌면 <추적자>의 백홍석은 손현주가 연기한 자상한 연인보다 <앞집 여자>의 상태나 <장밋빛 인생>의 반성문쪽에 서 있는 남자인지 모른다. 백홍석은 돈은 못 벌어도 가족의 꿈을 살뜰히 챙기는 건실한 가장이지만, 결국 그도 정치인의 이미지 메이킹에 쉽게 속아버리는 평범한 대중이다. 다른 여자와 함께 살기 위해 자식에 대한 친권까지 포기하려 할 정도로 대책없었던 <장밋빛 인생>의 반성문과 무리수에 무리수를 거듭하는 백홍석도 사실 한끗 차이다. 생명이 꺼진 거나 다름없는 소시민에게 정치인의 카리스마와 레토릭은 그처럼 달콤할 수밖에 없다. 남들은 욕을 할망정 사랑에 눈이 멀면 무모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상태와 반성문, 백홍석을 통해 볼 때 손현주는 단순히 평범한 소시민이 아니라 사람, 그중에서도 남자가 지닌 불가항력의 기질을 연기해온 듯 보인다. <추적자>를 만드는 이들은 지난 시간 동안 손현주와 시청자가 쌓아온 관계를 실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무나 명백하게도 우리와 같은 인간인 그가 딸과 아내를 잃고, 권력에 조롱당하고, 파괴되어가는 모습을 어디까지 지켜볼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이 연기해온 남자들의 역사에서 백홍석의 무리한 선택을 바라볼 손현주는 시청자에게도 불가항력의 심정을 경험시키고 있다. <추적자>의 이야기를 종잡을 수 없는 이유, 그리고 <추적자>의 마지막을 지켜보기가 두려운 이유, 그럼에도 그의 분투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유. 이게 다 손현주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