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뒤늦게 <추적자>에 꽂혔다. 왜 이 드라마를 진작 보지 않았나 후회스러울 정도다. <추적자>는 권력의 속성에 대해서는 <하얀 거탑>보다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돈의 힘에 관해서는 <돈의 맛>보다 제대로 된 맛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선택의 순간이 오면 그때서야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드러납니다”라는 김상중의 대사가 함의하듯, 세상이란 결국 만인과 만인의 투쟁이라는 시니컬한 시선이 특히 마음에 든다. 30억원에 죽마고우를 팔고 10억원에 ‘마누라보다 더 많이 밤을 지새운’ 후배를 팔아먹는 친구와 직장 선배를 둔 주인공의 마음이야 무너지겠지만, 세상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하여간 드라마와 영화를 통틀어 하드보일드 화법으로 한국사회를 이렇게 그럴듯하게 담아낸 적은 없는 것 같다. 굳이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대목을 짚는다면 재벌 회장님이 너무 열심히 일한다는 점일 거다(에이 작가님, 존귀하신 회장님이 언론사 간부 따위와 직접 통화를 하신다뇨).
이렇듯 <추적자>의 힘은 우선 각본에서 나온다. 사실 생소한 이름인 박경수 작가는 뛰어난 이야기와 머릿속에 각인되는 대사를 매회 펼쳐놓고 있는데 언젠가 꼭 한번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싶다. 힘있고 간결한 연출 또한 이 드라마의 장점일 것이다. 하지만 배우들의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있는 연기가 없었다면 <추적자>는 생뚱맞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당연히 손현주다. 그가 연기하는 백홍석은 하룻밤 사이 말도 안되는 운명의 농간에 사로잡힌 존재다. 강직한 말단 형사이자 따뜻한 아빠이자 착한 남편이던 그는 복수심에 눈이 멀어 스스로 죄악의 핏물구덩이로 들어가 분투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를 응원한다. 힘있고 가진 자들이 보기에 그는 “큰 마차가 먼 길을 가다보면 깔려죽는 벌레도 있기 마련입니다”라는 김상중의 대사처럼 ‘벌레’일지 모르지만 세상의 99%인 우리는 그에게 심정적으로 동조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바로 그 ‘벌레’니까 말이다. 그동안 수많은 드라마를 통해 소시민 중년남의 희로애락을 보여줬던 손현주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백홍석에 동화되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가 ‘벌레’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소시민의 껍질을 깨고 “지금부터 내가 검사고 이 총이 판사야”라고 말할 때 소름이 좍 끼쳤다면 그건 당신 또한 손현주의 자장 속으로 빨려들어갔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고백. 우리는 손현주를 표지에 모시기 위해 약간의 ‘특권’을 행사했다. 그 특권이란 <추적자>의 경우처럼 권력이나 돈이 아니라 ‘혈연’이다. 아는 사람은 아는 얘기지만 손현주는 <씨네21> 손홍주 사진부장의 친동생이다(두 사람은 외모뿐 아니라 목소리나 말투, 몸짓까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살인적인 스케줄과 캐릭터 몰입 때문에 쉽지 않았을 촬영과 인터뷰가 섭외된 데는 형인 손홍주 부장의 ‘내압’이 있었다는 얘기다. 형제관계까지 내세우며 그를 굳이 만난 이유? 당신이 알다시피 손현주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남자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