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정_남극에 가려다가 못 가신 적이 있어요.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었나봐요. 웬만해선 어떤 길을 뚫어서라도 가셨을 분인데. (웃음)
나영석_(진지하게) 사실 지진은 헤쳐갈 수 있었어요.
고현정_어머, 이거 보세요. 맞잖아요. (둘러보며) 방금 눈빛 보셨어요?
나영석_(웃음) 안전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 칠레 국민에겐 큰 재해상황인데 다큐멘터리팀도 아니고 웃음을 만드는 사람인 저희가 그곳에 들어간다는 점이 신경이 쓰였어요. 접는 게 맞다고 결정했죠.
고현정_결정 내린 직후 혹시 동료들 얼굴을 둘러보셨나요? 작가님, 스탭들 얼굴이 맑아지지 않던가요? 이후로 더 열심히 일하셨다거나…. (좌중 폭소)
나영석_아뇨. 저… 그런데 고현정씨는 남극 가보고 싶지 않으세요?
고현정_제가요? 오늘 대화에 집중을 안 하셨나봐요. 집 밖을 좀처럼 안 나가서 <1박2일>을 좋아한다니까요. (웃음)
나영석_저도 <1박2일> 끝나고 여행을 안 다녔는데 딱 한번 아이슬란드에 혼자 다녀왔어요. 오로라를 보고 왔어요.
고현정_오로라를 보기 전과 본 뒤에 뭔가 달라졌나요? 아니라고요? 그런데 왜 거기까지 가서 보는 거죠? 속은 거예요, 그럼! (폭소)
나영석_전 그냥 작은 목표 하나를 정해서 뭔가를 하는 쪽이 좋아요. 생각하기도 굉장히 편해지고 나 혼자 허비할 일도 없고 예를 들어 아이슬란드를 가면서 이번 여행의 목표는 오로라를 보는 거야라고 정해버리면 뒷일이 굉장히 편해져요. 집중하게 되고 비록 못 보더라도 집중하는 동안 일어나는 해프닝이 좋아요. “아이고 차 놓쳤네. 못 봤네”, 혼자 낄낄거리며 다니는 거죠.
고현정_오로라가 정확히 뭐죠? 좀더 들려주세요.
나영석_극지방 하늘에 생기는 녹색의 빛 커튼 같은 현상이 오로라인데요. 수도 레이캬비크는 인공광이 많아 밤에 오로라가 안 보인다고 해서 차를 렌트해 무작정 시골을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매일 밤 폭풍우에 눈보라가 쳐서 허탕만 치고 귀국 이틀 전에 수도로 돌아왔어요. 온천이나 가려고 관광안내소를 찾았는데 웬걸 4만원짜리 ‘오로라 투어’가 있는 거예요. 안내소의 80대 할아버지께 “오로라는 자연현상인데 어떻게 패키지가 있죠? 이건 복불복 아닙니까?” 물었더니(좌중 폭소) 전문 가이드가 오로라가 나올 만한 장소, 나올 만한 시간으로 안내하고 만약 못 보면 볼 때까지 계속 프리 투어를 해준대요. 하지만 제게 남은 시간은 이틀뿐이고 마침 비가 오기에 이튿날 예약을 하려고 했죠. 그런데 도인의 풍모를 하신 그 할아버지가 “오늘 거 예약해. 내일은 비 와” 하시는 거예요. 한번 믿어보자 해서 신청을 했는데 해가 지면서 비가 뚝 그쳐 마치 소금 뿌려놓은 듯 별이 빛나더라고요. 그래도 오로라는 보일락말락한 수준이어서 “내 팔자가 그렇지” 하며 돌아오는 버스에서 졸고 있는데 갑자기 기사님이 승객들을 내리게 했어요. 거기서 기적처럼 서쪽 하늘로 일렁이며 이동하는 오로라를 봤어요. 정녕 현실에 존재하는 그림이었구나 감동하고 나름 성취감을 느끼며 새벽 2시에 민박집에 돌아와 창문을 열었는데 금요일 밤이라 젊은이들이 미쳐 난리가 난 거예요. 평소에 해만 떨어지면 고요한 나라인데 딱 하루 금요일만 그렇대요. 거리의 사람들이 술 취해서 병 깨고 오줌 누고 여자 꼬시고 있는 그 풍경에 마음이 너무 안정이 되는 거예요. (좌중 웃음) 하늘의 고고한 오로라도 아름다웠지만 저는 땅 위의 그런 모습이 좋더라고요. 나란 사람의 마음은 결국 지상의 이런 아노미 상태에 닿아 있구나 싶었어요.
고현정_웅장한 자연을 보면 환기도 되고 에너지를 받는 부분이 있다고 권해주는 분들이 계셔서 궁금했어요.
나영석_저도 “그날 오로라를 보고 난 다른 사람이 됐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경험을 하고 싶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더라고요.
고현정_그건, 우리의 문제겠죠?
나영석_예. 그걸 문제라고 표현한다면요. (웃음) 웃긴 건 이튿날 아이슬란드 청년이 운전하는 차를 탔는데 오로라 본 적 있냐고 슬쩍 물었더니 “뭐, 오로라? 우린 만날 술먹다 나오면 보는 게 오로라야” 그러더라고요. 누군가에겐 “우와, 오로라!”지만 그들은 저게 오로란지 뭔지 신경도 안 쓰는 거죠.
고현정의 선물
to . 나영석 짐을 좀 덜어주면 좋으련만. 쓴웃음이 엷게 감도는 얼굴로 거북도사처럼 묵직한 등짐을 둘러메고 있는 화면 속 나영석 PD를 5년 동안 지켜보며 고현정이 자연히 품었던 바람이었다. 거북이 모양 은빛 열쇠고리를 선물로 고른 건 그러니 순전히 연상 작용의 결과였다. “이 친구를 지니고 다니시면서 지기(知己)로 삼으시면 어떨까 싶었어요. 거북이 등에 좀 짐도 나눠주시고, 상처도 많이 내주세요.” 나란 남자, 고단한 이미지의 화신이었구나 새삼 깨닫는 나 PD에게 고현정은, 흠집이 나고 광택이 무뎌질수록 오히려 예뻐지고 그러다 이따금 말끔히 닦으면 또 기분이 몹시 좋아질 거라고 소개팅 주선자처럼 꼬마 거북이의 미덕을 설명했다. 세월과 경험에 마모되면 되는 대로, 심기일전하면 하는 대로 멋이 난다니 주기적으로 탈진과 각오를 되풀이하는 직업의 종사자에게 적절한 마스코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