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이 제 삶에서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미처 몰랐어요. 몇달 전 고현정의 한숨 섞인 너스레였다. 문제의 남자는 KBS의 주말 버라이어티 <해피선데이- 1박2일>(이하 <1박2일>) 시즌1을 연출한 나영석 PD다. 2007년 8월 충북 영동에서 삼각깃발을 들어올린 <1박2일> 첫 번째 시즌은 올해 2월 말 전북 정읍에서 마침내 긴 캠핑을 끝냈다. 오래된 영화관에서 인상적으로 연출된 ‘고별 파티’에서 제일 많이 흐느낀 사람은 곰살맞은 구석이라곤 식은 맨밥에 반찬으로 쓰려 해도 없어 보이던 나 PD였다. 여행을 즐기지도, 자주 감행하지도 않는 고현정이 주야장천 여정에 오르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개근하다시피 정을 붙인 건 어찌된 영문일까. 이 부조화는, <1박2일>의 투어가이드 나영석 PD 역시, 숙련된 자발적 여행자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로 어렴풋이 납득이 간다. <1박2일>은 번번이 시청자에게 권할 만한 행선지를 선정해 길을 떠나지만 여섯 동행자의 48시간으로 채워진 서사에서 그 지방의 손꼽는 절경을 구경하고 별미를 먹는 순간은 클라이맥스가 아니다. 투박하고도 다정한 <1박2일>의 세계에서 목적지란 어쩌면 그저 지도 위에 찍힌 점이며, 보름에 한번씩 여섯 남자를 각오로 충전시키고 사소한 승부에 은하계 운명이 달린 양 치열히 골몰하게 부추기며, 개운한 탈진감에 젖어 귀가하는 과정을 반복하게 만드는 시동장치다.
열혈 시청자인 <씨네21> 최성열 기자는 <1박2일>의 미학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리한다. “비록 시한부지만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못 먹고 조그만 혜택에 집착하는 모습이 훈련소 상황과 똑같아요. 예비군 훈련도 비슷하죠. 여자들은 도대체 왜 저러나 싶지만 남자들은 모이면 무엇 하나 곧이곧대로 하지 않아요. 뭐든 게임하고 내기해서 진 사람을 시키죠. MT를 가도 얌전히 출발 못하고 정차역에서 내렸다 타는 놀이를 하다 누구 하나 낙오되기도 하고, 그냥 싸와도 되는 남은 음식을 몽땅 부침개로 만들어 게임의 패자한테 먹이기도 해요. (웃음)” 그러니까 배우 고현정이 정작 매료된 풍경은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가혹한 자연환경과 여행이라는 비일상적 조건에 힘입어 무장해제된 남자들의 생태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눈길이 머문 건 간혹 ‘마초적’이라는 불평을 들었던 <1박2일>의 우악스러운 남성성이 아니라 남자들만의 순진한 유희성이다. “예전 학교 다닐 때 3학년 1반 교실에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가위바위보 게임부터 공기놀이까지 추억을 만져주는 프로그램이었고 근래 방송에서 보기 드물게 순하고 순진한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KBS와 MBC를 각기 대표하는 <1박2일>과 <무한도전>의 비교는 우열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시대 두 탁월한 예능 PD의 개성을 보다 선명히 드러내기에 해볼 만하다. 김태호 PD가 매번 구조를 재발명한다면, 나영석 PD는 동일한 양식을 우직하게 고집하되 그것이 식상함을 부르지 않고 줄곧 사랑받도록 하는 재능으로 빛을 발한다. ‘무한’과 ‘2일’의 대조가 상징하듯, 김태호 PD가 몇달에 걸친 장기기획을 비축하는 연출자라면 나영석 PD는 그 주일의 시놉시스마저 천재지변을 만나 붕괴되고 맨땅에 이마를 부딪쳐야 하는 순간 온전히 살아 있는 듯한 흥분이 솟는 연출자다. 언어적 사고는 전무하고 이미지를 통해 생각한다고 자평한 바 있는 김태호 PD와 반대로, 작가지망생 출신인 나영석 PD는 순연하게 이어지는 서사에 강하다. 과연 고현정의 질문을 받아든 그의 대답은 하나하나가 시냇물처럼 굽이치는 작은 이야기였다. 나영석 PD는 ‘다같이’라는 부사를 자주 썼고 아이디어의 기원을 설명할 때면 여러 제작진의 대화체를 재연했다. 그는 문득 이렇게 덧붙였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저’는 제 이름으로 대표되는 작가, 조연출, 멤버들 전체예요.”
나영석 PD의 섹시한 음색을 <1박2일> 시즌1의 큰 경쟁력으로 서슴없이 꼽았던 고현정은 이날 원없이 귀기울였다. “감독님 만난 기념으로 우리 이 테이블에서 생수병 뚜껑으로 알까기 할까요?”라고 명랑하게 제안하는 그녀를 보며, 고현정이 출연했어야 했던 <1박2일> 특집은 ‘여배우편’이 아니라 ‘시청자 투어’가 아니었을까 잠깐 고민했다.
고현정_<무한도전> 팬들이 많다고 하는데 저는 <1박2일>이 진심으로 더 재미있어요. 그런데 주변에는 온통 <무한도전>이 제일 재미있다는 사람뿐이라 따돌림당하는 지경이에요. 다 일러야지? (웃음)
나영석_두 프로그램 다 리얼 버라이어티로 불리지만 연출 스타일이 다르고 시청자 층도 확연히까지는 아니어도 차이가 있어요. <무한도전> 팬들은 좀더 젊고 <1박2일>은 30, 40대가 많이 보죠. 젊은 분들은 아기자기한 재미를 선호하는데, 저는 단순한 재미, 편한 것을 좋아하는 연출 스타일이에요. 어찌보면 고현정씨도 나이가 좀 있으시니까…. (웃음)
고현정_중간에 나오는 복불복 내기도 제 취향에 맞고요.
나영석_하하. 예능 정말 좋아하시나봐요.
고현정_그리고 제가 여행은 고사하고 집 밖을 잘 나가지도 않는 사람인데 <1박2일> 덕에 숨겨진 곳곳을 많이 봐서 좋기도 했어요.
나영석_저 역시 여행을 즐겨 다니지 않던 사람이라 일하는 동안 덕분에 좋았어요. 시작할 때는 그렇게 좋은 곳이 많을 줄 몰랐어요. 다니다보니 공부하게 되고 공부하니 또 다른 곳을 알게 됐죠.
고현정_<1박2일>이 KBS의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감독님 의도와 무관하게 ‘KBS스러운’ 색깔이 들어가는 경우는 없었나요? 간혹 자막이 지나치게 다같이 감동하자고 유도하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나영석_막상 일해보면 방송사라는 곳이 그런 압력을 가하진 않아요. 실상은 연출, 출연자, 작가가 공감대를 쌓아가며 조금씩 방향성을 맞춰가는 과정에 가깝죠. 자막도 여러 PD들이 나누어 쓰는데 아무래도 프로그램의 본성과 무관하진 않겠죠. 방금 말씀하신 부분은 모든 걸 반추해볼 때 제가 좀 촌놈이라 그런 걸 좋아하는 것과 관계있을 거예요.
고현정_촬영현장에서 지켜보시기 때문에 시청자가 못 본 무엇을 속속들이 봐서일까요?
나영석_예를 들어 ‘외국인 노동자 특집’에서 노동자들이 나중에 가족을 만나 부둥켜안는 장면이 있었어요. 옆에서 보면 제작진도 다 울고 있어요. 그런데 현장에서 본 광경이 100이라면 촬영한 화면은 80밖에 안되는 것 같거든요. 내가 느낀 바를 시청자도 똑같이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담백하게 가야지 하면서도 실제로는 욕심을 부리는 경우가 생기더라고요. 보시면서 이물감을 느꼈다면 그런 부분을 자연스럽게 처리하지 못한 것이니 제가 미숙한 거죠. 근본적으로는 저라는 사람의 성정이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표현했느냐 이전에 외국인 노동자 기획 자체에 어떤 광경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는 거니까요. 신파적이랄까, 암만 생각해도 저는 쿨한 타입은 아니에요.
고현정_그런 성향을 예능과 만나게 해서 아사무사하게 웃음도 주고 감동도 끌어내면서, 끝내는 “우리 함께 갑시다. 이런 일들을 너무 모른 척하고 살지 맙시다”라는 메시지마저 전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거잖아요. 스튜디오에서도 힘든 일을 매번 야외로 나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숱한 변수를 안고 한 건데 두렵진 않으셨나요?
나영석_제가 엄청 꼼꼼하다거나 계획대로 안되면 안절부절못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유형있죠? 돌발변수가 생기면 큰일났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거예요. (웃음) 예를 들어 어느 섬에 들어가야 하는데 코앞에서 비가 쏟아져 못 가요. 아무튼 오늘 안에 다 찍고 가야 하니 이 자리에서 뭐든 해야 하는데 연출자로서는 힘들게 준비해온 것이 아까우면서도 나도 모르게 아드레날린이 솟아요. 아까운 건 아까운 거고, 이미 어쩔 수 없잖아요. 계획을 버리고 주어진 것 안에서 뭔가 우당탕 쿵쾅 만들어야 할 때 뭐랄까 더 기쁨을 느껴요. 제가 변탠가요?
고현정_“<1박2일> 하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나영석_엄청요. 회의하고 편집할 때는 죽어라 힘들지만 촬영장에선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고현정_하는 일이 없으시니까요! (호탕한 폭소)
나영석_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정곡을 찌르니까 좀 마음이 아프네요, 하하. 힘든 일은 사실 다른 분들이 많이 해주시고 연출자는 구경꾼이랑 비슷하죠. 같이 여행하는 기분에 가까웠어요. 여행이란 스케줄대로 되면 재미없잖아요. 중간에 사고 터지고 그럴 때마다 ‘앗싸!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 보자’ 하며 제일 빨리 보는 시청자의 느낌으로 보는 거예요.
접을 건 접고 싸울 건 싸워 얻어가며
고현정_원래 PD가 꿈이셨나요?
나영석_충북 청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는데, 꿈이랄 게 없었어요. 시키는 대로 공부해 대학에 왔는데 우연히 연극반에 들어가 이쪽 일이 굉장히 재밌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학교 연극반은 사람이 적으니 역할이 정해져 있다기보다 연기도 했다가 대본도 썼다가 연출했다가 조명도 했다가 돌려막기를 하잖아요? 연극하면서 처음으로 희열 비슷한 걸 느꼈어요.
고현정_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재밌으셨던 걸까요?
나영석_다같이, 마음 맞는 사람 열댓명이 우당탕 쿵쾅하며 술먹고 싸우기도 하고, 되지도 않는 연기에 되지도 않는 연출일지언정 몇달을 고생해 결과물을 보고 그 안에서 좌절도 했다가 환희도 느꼈다가 하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심장이 짜릿짜릿했어요. 그런데 연기는 한번 해봤더니 갈 길이 아닌 것 같고. (웃음)
고현정_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 뭔가를 보는 일은 되고, 그러셨던 건가요?
나영석_아뇨. 그것보다 그저 좋은 사람들이랑- 사실 시간이 흘러 생각해보면 그때 함께한 사람들이 다 좋은 사람인 것도 아닌 듯하지만- (좌중 폭소) 그 순간만큼은 접을 건 접고 싸울 건 싸워 얻어가며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그때까지 혼자 공부하고 시험보며 대학까지 온 인생과는 너무 달랐어요. 아버지는 방학 때도 안 내려오는 제가 행정고시 공부하는 줄 아셨지만 사실은 연극 연습하느라 서울에 있었어요. 저는 연극을 할 때에도 심각한 작품보다 코미디를 하고 싶었어요. 한창 코미디 대본을 쓸 무렵 당시 인기있던 송창의 감독님의 시트콤 <세친구>에서 1회 분량 에피소드를 써서 보내면 그중에서 막내작가를 뽑는다는 자막을 봤어요. 이건 날 위한 기회다 싶어 대본을 썼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100% 붙을 줄 알았는데 발표날 일과가 끝나는 6시가 다 되도록 전화연락이 안 왔어요. 착오가 생겼나 슬슬 걱정이 들기 시작했죠.
고현정_(웃음) 착오였죠?
나영석_결국 못 참고 114에 번호를 물어 전화했어요. 당연히 아직 연락 못 받으셨으면 떨어진 거라는 답이었죠. 무척 큰 충격이었어요. 이게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첫 시도에 딱 실패했으니까요. ‘프로들이 보기엔 내 재주가 턱도 없는 거였나?’ 싶고. 그러다 영화사 연출부로 입사했어요. 제작부장님이 만날 누군가와 “요즘 정재는 뭐해? 민수는?” 이런 통화를 하고 있는 회사였는데 어느 날 출근했더니 사무실이 없어졌더라고요. (웃음) 남은 옵션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방송사 PD 시험을 봤는데 운좋게 붙었어요.
고현정_공부를 잘하셨군요. 역시 어른 말씀은 듣고 볼 일이에요. (웃음) 방송사 들어가시니 어떻던가요?
나영석_좌절했습니다. 잘못 들어왔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제 기준에서 저는 굉장히 숫기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방송사에서 모집요강에 써놓진 않지만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예능 PD의 성격이 있는 거예요. 카리스마도 있고 리더십도 있어서 현장을 딱 진행하면 스탭이나 연기자들이 어쩐지 수긍하고 일사불란하게 잘 따르는 사람한테 맞는 일로 보였어요. 그런데 저는 남의 눈도 잘 못 쳐다보고, 선배가 가수 누구 스탠바이시키라고 하면 가서 “저… 저기요” 하고 말도 잘 못했으니까요.
고현정_그러다가 극복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나영석_멘토를 잘 만났죠. 선배 이명한 PD께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아주 간단하게 말씀하시더라고요. PD가 하는 일이 좋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인데 그럼 거기 집중하면 되지 네 고민은 아무리 좋게 봐도 곁가지다. 더 편하고 빠른 길일 수는 있어도 본질은 아니지 않겠니. 좋은 프로그램을 해내면 사람들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속으로 자기는 잘하니까 저렇게 말한다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동의가 됐어요. 그리고 전 예전부터 포기가 빨라요. 어쩌겠어요. 안되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게 낫죠. 그래서 언젠가부터 현장에서는 뒤에 서 있고 기획이나 회의에 중점을 뒀죠. 그러면서 조금씩 프로그램 만드는 재미를 느끼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