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이 장편소설을 축약한 것이 아니듯 단편영화도 장편영화의 편집본이 아니다. 단편에는 단편만의 미학과 가능성이 있다. 재기발랄한 상상력을 자랑하며 신인감독의 등용문이 되어온 미쟝센단편영화제가 6월28일부터 7월4일까지 CGV용산에서 11번째 축제를 시작한다. 현역 감독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 의미있는 영화제는 이제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단편영화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대 최대인 총 926편의 작품이 출품되어 그중 60편의 본선 경쟁작이 관객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 한편 빛나지 않는 작품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섹션별로 특별히 장르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 15편을 먼저 살짝 소개한다. 이 짧은 안내문에 만족하지 말고 지금 당장 극장으로 달려가 한국영화의 미래를 두눈으로 꼭 확인해보시길 권한다.
비정성시 부문
희망버스 러브스토리 Hopebus, A Love Story 감독 박성미 / 2012년 / HD / 컬러 / 8분26초 85호 크레인에는 두 사람의 죽음에 얽힌 슬픈 사연이 있다. 시간이 흘러 2011년, 한 여성노동자가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며 크레인 위에 오른다. 홀로 외로이 투쟁을 해나가던 그녀의 소식을 듣고 많은 이들이 달려오지만 경찰의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진압에 사람들은 끌려가고 흩어진다. <희망버스 러브스토리>는 제목 그대로 희망버스가 피워올린 기적 같은 승리에 관한 이야기다. 레고 인형을 활용한 스톱모션으로 촬영한 이 영화는 환상의 극단에서 피어나는 진실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이색적인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희망과 승리의 메시지는 짧은 만큼 선명하고 효과적이다.
누가 공정화를 죽였나? Who killed Gong Jung-wha? 감독 한지혜 / 2012년 / HD / 컬러 / 24분 공정화가 죽었다. 그녀는 스물아홉 꽃다운 나이에 왜 세상을 등지게 되었을까. 영화는 그녀의 주변인들과의 인터뷰와 그녀가 경험한 일들을 되짚어가며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씩 알려준다. 그런데 그 사정이 참 엉뚱하면서도 날카롭다. 세상의 규격에 맞지 않는 자들을 주저없이 ‘루저’라 부르는 우리 사회를 비꼬는가 하면 어느새 꿈과 환상을 뒤섞는다.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튀는 연출의 개성과 자유분방함은 드라마의 불협화음을 넘어 재기발칙한 쾌감마저 안겨준다. 짧은 시간에 파편적으로 구성되는 메시지들은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영화 끝자락에 안겨주는 묵직함은 실로 인상적이다.
마취 Anesthesia 감독 김석영 / 2011년 / HD / 컬러 / 23분 신입 간호사 지현은 박 원장이 수면내시경 환자를 성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동료 간호사들은 지현의 말을 반신반의하며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확인까지 하지만 정작 사실로 드러나자 신고하길 주저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지만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성폭행 그 자체에 관한 문제보다는 마비된 개인의 윤리의식쪽에 가깝다.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과 선택을 섬뜩하게 펼쳐놓는 이 영화는 각자의 이익 때문에 사건을 은폐하려는 동료들과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드는 성범죄의 악질적인 면이 결합할 때 진실과 상식이 얼마나 쉽게 마취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투 포커스 Into Focus 감독 조영준 / 2011년 / HD / 컬러 / 28분30초 판근은 엑스트라다. 하지만 배우라는 꿈이 있기에 포커스 아웃된 화면조차도 그에게는 소중하다. 어느 날 급변경된 대본 덕분에 유명 TV드라마 단역 기회가 주어지자 그는 삭발까지 감행하며 혼신의 연기를 다한다. 그러나 주연배우의 스캔들로 어렵게 찍은 화면은 통편집당하고 아쉬운 대로 잘려나간 미방영분 필름이라도 얻으려 해보지만 보잘것없는 엑스트라에겐 그마저 쉽지 않다. 영화는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도, 애써 심각한 이야기를 늘어놓지도 않지만 제대로 된 목소리 한번 못 내는 이 땅의 모든 엑스트라들을 향한 마지막 장면의 위로가 제법 넉넉하고 따뜻하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부문
나의 오른쪽, 당신의 왼쪽 On the other Side of You 감독 이주영 / 2012년 / HD / 컬러/ 16분30초 이미 회사를 다니고 있는 무료한 남자와 이제 회사를 다니고픈 꿈 많은 여자, 연결고리라곤 하나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 두 남녀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각각의 입장에서 삶, 사랑, 성공과 실패에 대한 생각들을 두런두런 들려준다.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대체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이유는 모두 제각각이다” 같은 톨스토이의 격언처럼 상황에 어울릴 법한 각종 문구들에 빗대어 표현되는 섬세한 감성들이 약간은 간지럽고 그만큼 달콤하다. 시적인 대사의 힘과 부드럽고 세련된 영상의 조화가 눈에 띄는 영화.
꽃은 시드는 게 아니라… A Flowers Does Not Wilt, But… 감독 오태헌 / 2012년 / HD / 컬러 / 24분55초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재회는 무엇일까. 졸업영화 찍을 돈을 벌기 위해 일년간 휴학했던 한성은 복학하자마자 스탭으로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문제는 감독인 세원이 자신의 옛 여자친구 수영의 현재 남자친구라는 것. 게다가 수영이 조연출이다. 한참 전에 정리됐다 생각했건만 현장에서 두 사람을 계속 보자니 한성은 세원이 왠지 밉살스럽다. 영화학도들의 이야기인 만큼 경험이 충분히 녹아들어 장면마다 디테일이 살아 있다. 헤어진 남자의 찌질함이 반영된 대사의 잔재미도 만만치 않다. 줄기차게 세원의 영화를 까는 한성의 말과는 반대로 이 영화는 ‘재미가 있다’.
희극지왕 부문
IMPACT IMPACT 감독 최재혁 / 2012년 / HD / 컬러 “임팩트가 부족해!” 그 한마디에 <두근두근 초콜릿>이 순식간에 <블루 칼라 레볼루션>으로 탈바꿈한다. 이야기를 팔러간 작가는 영화제작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탐탁지 않아 하자 다급한 마음에 즉석에서 시나리오를 수정해나간다. 당연한 말이지만 손을 대면 댈수록 이야기는 점점 엉망이 되고 끝내는 뒤죽박죽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로맨스로 시작한 영화가 액션을 거쳐 스릴러에 다다를 때 즈음이면 이건 더이상 영화도 뭣도 아니지만 영화가 엉망진창으로 망가져갈수록 웃음은 더해간다. 특히 엔딩을 보고 나면 모두 따라 외치게 될 것이다. 임팩트!
환상의 콤비 The Fantastic Duo 감독 전병덕 / 2012년 / HD / 컬러 / 24분45초 개그맨 박상준은 어느 날 밤 음주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낸다. 그는 인기가 떨어질까 두려운 마음에 저수지로 시체를 버리러 가지만 관리인 덕규와 마주치며 상황은 점점 꼬여만 간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저수지에서 덕규를 만난 것부터 시작해서 죽은 줄 알았던 학생이 다시 살아나고 덕규를 꼬드겨 겨우 수습되는가 싶었더니 이번에는 아이들이 떼로 나타난다. 상황은 수습하려 할수록 통제 불가능 상태로 빠지고 그 안에서 안간힘을 쓰는 두 남자의 모습이 애처로우면서도 묘한 웃음을 유발한다. 자잘한 소품들을 활용한 아이러니한 장면들 역시 영화 전반 실소를 자아낸다.
알레그로 Allegro 감독 주윤철 / 2011년 / HD / 컬러 / 12분40초 택배 배달원인 주인공은 프리러닝으로 배달을 한다. 복잡한 주택가를 제 집처럼 휘젓고 다니며 프리러닝을 즐기던 주인공이었지만 배달 도중 사고를 당한 뒤 사장에게 프리러닝을 금지당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급하게 혈액팩을 이송해야 하는 앰뷸런스가 교통체증에 옴짝달싹 못하는 모습을 본 주인공은 자신이 프리러닝으로 배달해주기로 마음먹고 혈액을 탈취한다. 단순한 스토리라인에서 알 수 있듯 오직 도심을 활보하는 주인공의 액션을 선보이기 위한 애니메이션이다. 놀라운 것은 그 수준이 결코 여느 상업애니메이션에 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뛰고 구르고 벽을 타는 활강 액션만으로도 충분히 만끽할 만하다.
절대악몽 부문
숲 Forest 감독 엄태화 / 2012년 / HD / 컬러 / 32분16초 모두의 마음속엔 작은 괴물이 산다. 질투, 자격지심, 사소한 오해처럼 질척거리는 감정들. 그 괴물들은 서로의 관계를 망치려 호시탐탐 우리를 노린다. 절친 태식과 구정은 에스더를 사이에 두고 묘한 신경전을 벌인다. 숲으로 놀러간 세 사람은 왕 게임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태식은 구정에게 자살장면을 페이크다큐로 찍자고 제안하고 두 사람은 위험한 놀이를 시작한다. 세 사람이 함께했던 왕 게임과 페이크다큐 촬영장면이 교차하는 가운데 숨기고 있던 비밀이 차츰 드러난다. 정교한 플롯 구성이 자아내는 조밀한 긴장감이 인상 깊은 영화다.
귀류 Ghost Species 감독 천승훈 / 2011년 / HD / 컬러 / 24분9초 세상엔 아직 인간이 밝혀내지 못한 존재들이 얼마든지 있다. 오랜 구직생활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한 사내가 일당직 구인광고에 전화를 건다. 불려간 곳은 어느 구석진 점집. 무당의 해괴한 제안에 찜찜한 마음을 감출 수 없지만 당장 현금이 급한 남자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남자의 몸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심령 미스터리 장르를 기반으로 한 영화는 전통적인 호러영화의 양식에 충실하다. 사운드, 영상, 리듬, 어느 하나 튀는 것 없는 조화를 바탕으로 긴장과 공포가 적절히 배합된 안정감을 선보인다.
부두인형 사용 설명서 Voodoo Dolls Instruction Manual 감독 박경돈 / 2012년 / HD / 컬러 / 23분34초 두통에 시달리는 예민한 건축가는 집으로 돌아와 작업 중이다. 그런데 위층 아이의 소음이 계속 그의 신경을 건드린다. 내일까지 마감이라 한창 민감해져 있는데 새벽이 되어도 위층의 소음은 계속된다. 참을 수 없는 남자는 집으로 오는 길에 산 부두인형 열쇠고리에 괜한 화풀이를 하다 손에 상처까지 입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부두인형의 목을 비틀자 저주의 효과가 있었는지 윗집이 조용해진다. 영화는 스트레스에 예민한 남자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주목하는 듯하다가 끝에 이르러 갑자기 방향을 급선회한다. 결말은 눈으로 직접 확인할 것.
4만번의 구타 부문
독개구리 Poison Frog 감독 고정욱 / 2011년 / HD / 컬러 / 30분55초 부대로 복귀하던 정 하사 일행은 두명의 수상한 병사를 붙잡는다. 남한군 복장에 인민군 따발총을 들고 있는 한규는 자신이 몰살당한 국군부대의 생존자라고 주장하고 딱 봐도 탈영병처럼 보이는 영복은 부대의 허락을 받고 잠시 고향집으로 가던 길이라며 넉살을 떤다. 정 하사 일행은 수상한 두 사람을 포로 삼아 길을 떠나지만 한규는 도리어 정 하사 일행이 위장한 북한군이라며 영복을 꼬드긴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모호한 가운데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일행은 서로를 의심하며 길을 재촉한다. 서로의 정체를 두고 끝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이 영화는 여타 상업영화에 비교해도 손색없는 높은 완성도가 먼저 눈에 띈다.
가정방문 The Visitor 감독 김보영 / 2012 / HD / 컬러 / 23분4초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어디까지 용기를 발휘할 수 있을까. 출산휴가를 앞두고 있는 선생 보람은 만삭의 몸을 이끌고 진아네로 가정방문을 한다. 진아의 영어말하기대회 신청서에 도장을 받아가려고 온 보람은 진아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남자가 진아의 아버지가 아닌 강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미 공포에 질려버린 보람은 도움을 요청하는 진아를 외면한 채 혼자 도망치려 한다. 극한 상황에서의 윤리적 선택을 두고 그것만으로 인간의 선악을 판단하여 비난할 순 없지만 ‘사람답게 살라’는 강도의 말이 두고두고 뇌리에 남는다.
판도라 Pandora 감독 허명행 / 2011년 / HD / 컬러 / 21분21초 2011 충주세계무술축제에서 무술시연을 하기로 한 서울액션스쿨팀 소속의 정훈은 일행보다 하루 일찍 충주에 내려온다. 숙소로 이동하던 중 어떤 남자가 떨어뜨린 휴대폰을 주운 그는 이후 휴대폰을 노리는 일당에게 계속해서 습격을 받는다. 영문도 모른 채 휴대폰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훈은 휴대폰의 정체가 국가기술이 담긴 중요한 물건이란 걸 알게 된 뒤 경악한다. ‘서울액션스쿨’이란 명함에서 알 수 있듯 액션을 위한, 액션에 의한, 액션의 영화다. 일대일, 일 대 다수의 격투부터 떼거리 액션장면까지 몸으로 하는 액션이 종합선물세트처럼 준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