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현. 이 사람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 게 벌써 10년째다. <세계음악기행>이라는 월드 뮤직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처음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금은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12시에서 1시 사이에 <전기현의 음악풍경>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한편 라디오 전문 DJ이지만 그가 중요하게 하는 일이 또 하나 있다. OBS 경인TV에서 방영되는 영화 음악 프로그램 <전기현의 씨네뮤직>이다. 이 프로가 방영 일주년을 맞았다. 영화와 음악이 동등하게 존중받는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토요일 밤 현란하고 산만한 방송들이 많은 시간대에 휴식 같은 영화와 음악과 목소리를 듣고 싶은 당신이라면, 그와 금방 친구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를 만났다.
-월드 뮤직 라디오 프로그램 DJ로 유명하다. =원래도 좋아했지만 파리에서 유학할 때 더 폭넓게 듣게 됐다. 처음부터 라디오 DJ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라디오 세대이기 때문에 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 것 같다. 결국 많이 모아둔 음반들이 빛을 보게 된 거다. (웃음) 월드 뮤직 전문가를 찾다가 친구 소개로 내게 연락이 왔고, 하게 됐다. 그런데 라디오는 처음 할 때부터 낯설지가 않았다.
-방송 출연을 한 적도 있다. =귀국 직후 음반 사업팀에 있었다. 그렇게 음반들을 내다가 회사에서 “네가 샹송도 하나 불러서 넣어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렇게 했고 어쩌다 사진도 나가게 됐다. 또 어쩌다 광고까지 찍게 된 거다. 의류 광고, 남성 화장품 광고 등이었는데, 카피가 대강 이런 거였다. “프리랜서는 프리랜서를 입는다”, “남자가 여자보다 아름답다”. <컬러>라는 윤석호 PD의 드라마에도 출연한 적 있다. 그런데 배우로서는 소질이 없었다. (웃음)
-파리에서는 음악이 아니라 영화를 공부했다던데. =파리 7대학에서 영화방송학을 공부했고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뭐 특별히 연출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고 영화가 좋았고 궁금하고 알고 싶었다. 영화는 실컷 본 것 같다.
-<전기현의 씨네뮤직>이 1년 됐다. 어떻게 맡게 됐나. =<울림>이라고 가수 김현철씨가 진행하던 OBS 경인TV 콘서트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프로 중 일부로 5분짜리 새 코너를 만들었던 게 지금의 전신이다. 그걸 내가 맡아 했었다. 그런데 반응이 좋았었나 보더라. 지금 <전기현의 씨네뮤직>으로 확장된 거다.
-매회 테마별로 진행된다는 게 특이하다. =우리는 오히려 개봉작은 피한다. (웃음) 계절도 생각하고 그달의 이슈도 생각하고 또 중요한 배우나 작곡가들 위주로도 고른다. 예를 들어 영화 속 전쟁이라는 테마라고 한다면, <디어 헌터> <지중해> <특전 U-보트> 등 영화 클립과 함께 음악을 들려준다. 그리고 되도록 음악을 끊지 않으려고 한다.
-다룬 테마 중에서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이 있나. =영화로 치면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이 있고, 작곡가별로 본다면 엔니오 모리코네, 프랜시스 레이, 모리스 자르, 존 베리 등이 좋았다. <대부> 시리즈는 내가 우겨서 했고. 왜냐하면 그건 파리에 있을 때 특별한 경험을 해서다. 밤 10시에 시작해서 다음날 아침까지 영화를 보고 나왔더니 문 앞에서 빵을 나눠줬던 기억이 난다. 아, 그리고 조르주 들르뤼, 92년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 영화음악 작곡가인데, 음악이 참 좋다. 장 뤽 고다르의 <경멸> 음악을 했었다.
-개인적인 취향이 많이 반영되나. =음악에 관해서는 거의 그렇다고 봐야 할 거다. 좋은 영화도 골라야 하겠지만 좋은 음악이 우리로서는 더 중요하다. 영화까지 좋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음악에 중점을 두고 그다음에 영화를 고른다. 텔레비전 프로지만 라디오하고 유사한 프로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처음에 내가 기획 제안을 받을 때도 그렇게 받았다. 라디오를 듣는 것과 같은 방송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고 기획자가 말했고 그래서 나도 무조건 하기로 했던 거다. 라디오가 좋은 건 영화가 좋거나 나쁘거나와 무관하게 음악이 좋으면 그 영화의 간단한 시놉시스만 들려주면 그 영화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것이다. 우리 프로그램이 독특한 게 그런 거다.
-소개하고 싶은 소재들이 분명 많을 텐데. =작곡가로 치면 조르지오 모로더, 헨리 맨시니를 하고 싶고 배우는 알랭 들롱을 한번 다루고 싶다. 그가 출연한 영화들 중 음악이 좋은 영화들이 많으니까. 그리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메릴 스트립을 주제로 한 방송이 나갈 거다. 감독으로 치면 제임스 아이보리, 그리고 누구보다 니키타 미할코프의 영화들. 가을쯤에 꼭 한번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