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 가지 의미에서 역사적이라고 할 만한 <청춘낙서>는 거의 조건반사적이라고 할 만한 공식으로 신화를 만들어냈다. 흘러간 팝송들과 하루살이같이 사라진 시대의 신화를 영화로 만드는데 필요한 제조공식 말이다. 카메론 크로의 상당부분 자전적인 영화 <올모스트 페이모스>는 1973년 봄(때마침 <청춘낙서>가 대봉되기 몇달 전이다)을 배경으로, 좀더 화려한 요소들을 재료로 삼긴 하지만 이와 유사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60년대의 요란한 파티를 놓쳐버린 세대에게 바치는 영화 <올모스트 페이모스>는 독선적인 반문화, 반상업주의(anti commercialism)를 그들의 어머니 세대에 겹쳐놓으면서 시작한다. 크로의 또다른 자아인 윌리엄은 거칠고 강압적인 과부(매력이라곤 안 느껴지는 호전성을 지녔다,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아들로 등장한다. 어머니는 일종의 좌파적인 대학교수이며 직업적인 데모꾼으로서, 사이먼과 가펑클을 마약과 섹스의 위험한 전도사로 여길 만큼 대책없는 사람이다. 엄마의 지나치게 경도된 윤리적 시각은 윌리엄의 누나를 일찌감치 가출하게 만들었으며 누나는 떠나기 전 자신의 음반을 모두 어린 11살짜리 동생에게 넘겨주며, “언젠가는 쿨하게 눈뜨게 될 것을” 당부한다. 이런 영향으로 장래희망이 록음악 비평가가 된 조숙한 아이 윌리엄(패트릭 퓨짓)은, 69년부터 73년까지, <크림>에서 일하며 편집자인 레스터 뱅즈(록음악 비평계의 살아 있는 신화로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이 그 역을 맡았다)에게 많은 것을 빚지게 된다.
타입은 좀 다르지만, 뱅즈도 반상업주의 떠버리이기는 윌리엄 어머니와 다를 바 없다. 그리하여 이 어리고 야심만만한 글쟁이 주위에는 사이코틱하고 지나치게 과보호적인 어머니와 세상과 좀 거리를 둔 채, 오디푸스적 번민을 이젠 넘겨버리려 준비중인 괴팍한 교사가 포진하고 있는 셈이다. 뱅즈는 지친 듯 윌리엄에게 일러준다. 록음악은 이제 죽었다고. 윌리엄은 “죽어가는 몸부림을 보기 딱 알맞게 시간맞춰 온 셈”이라고. 그러나 사실 록음악은 윌리엄에게 대안적인 가족과 교육과 싸구려 기쁨과 명백한 직업기회를 준 셈이기도 했다. 아직 루키인 윌리엄은 무대 뒤로 들어가 블랙 사바스를 인터뷰하는 데는 실패하지만, 동정심 많은 페니 레인(케이트 허드슨) 덕분에, 그룹 스틸워터와 친분을 갖게 되는 데 성공한다. 스틸워터는 러셀 해먼드(빌리 크루덥)와 제프 비브(제이슨 리)가 이끄는, 레드 제플린과 배드 컴퍼니의 짬뽕쯤 된다고 할 만한 음악팀이다. “나는 얼굴마담이고 너는 신비스런 기타리스트다.” 제프가 러셀에게 유머러스하게 한 말이 그들의 홍보용 티셔츠에 써 있다.
떠버리 제프가 늘 의욕에 차 있는 윌리엄을 “적”이라고 빗대어 부르는 것과 달리, 러셀은 스틸워터(아니면 최소한 그 자신)가 이 어린 기자를 활용할 바가 많을 것임을 깨닫고 그에게 투어를 같이 할 것을 제안한다. <올모스트 페이모스>는 한때 록비평이 화려하고 영웅적이었던 시대에 관한 영화라고 묘사돼 왔으나, 실은 유명인사에 대한 저널리즘(celebrity journalism)의 화려함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팝의 힘은 팬들과 만나는 무대 위보다 저 무대 뒤쪽 관점에서 묘사된다. 윌리엄은 스틸워터의 음악에 대해 영양가 있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할 능력이 못 되는 가운데, 그저 그들의 라이프스타일만 배워야 할 판이다. 그러다가 윌리엄은 자만심 강한 인사 벤 퐁 토레스의 권유로 <크림>에서 <롤링스톤>으로 상향이동할 기회를 맞게 된다.
개괄적으로 주욱 훑는 형식이지만 아늑하며 활기있고 입심좋은 이 영화는 시트콤들을 이어붙인 듯 코믹하기도 하다. (케빈은 12살)의 두 시간짜리 특별판이라고 봐도 될 듯하다. 그중 한 개그를 소개하자면, 윌리엄의 어머니는 아들이 묵고 있는 온갖 호텔들에 전화해댈 뿐 아니라 학생들에게 강박적으로, “록스타들이 내 아들을 유괴해갔다”고 호소하는 식이다.
윌리엄은 여러 가지 난폭한 모험을 즐기기도 한다. 한번은 러셀과 함께 십대들의 파티를 찾아가는데 여기서 러셀은 환각제를 복용하고 스스로를 황금의 신이라고 떠들어대다가 급기야는 지붕에서 수영장으로 뛰어내린다(그 깊숙한 캔자스까지도 광란의 파티가 그때 이미 퍼져 있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록 아티스트들과 팬들이 한데 어울려 엘튼 존의 노래를 부르며 공감대를 느끼는 장면 등도 소다 팝과 마찬가지로, 그 세대 사람들에게 향수를 느끼게 하는 세대적 취향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윌리엄이 클리블랜드로, 그리고 마침내 뉴욕으로 자기 커리어를 일구어나가는 동안 온갖 파티와 경력도 점점 더 진해진다.
“중요한 건 돈이 아냐. 음악을 연주하고, 사람들을 신나게 하는 게 진짜 소중한 거야.” 스틸워터 멤버들은 <롤링스톤> 커버에 오르기까지 서로에게 끊임없이 말한다. 그러나 <올모스트 페이모스>는 이 영화 자신의 떳떳하지 못한 양심을 그저 덮고 없애버린다. 제리 맥과이어가 말했듯 크로의 특기는 하나의 원칙으로 매진하는 것이다. <올모스트 페이모스>는 대부분 일종의 배신을 포함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의 결말들을 가지고 실험하다가, 결국 가장 긍정적인 대안에 정착했다. 관객은 윌리엄이 환멸을 느끼기를 기다리겠지만, 그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