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다라>라는 영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대뜸 잔다르크를 떠올렸다. 그런데 이 잔다라는 여자도 아니었고, 프랑스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실망한 것은 아니다. 지난 90년대에 프랑스에서 몇해를 보내는 동안 잔다르크에 대한 내 인상은 크게 일그러졌으니까. 그게 잔다르크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잔다르크가 성녀냐 마녀냐, 순결의 화신이냐 강박신경증 환자냐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의 실상이 무엇이었든 문제는 국민전선을 비롯한 프랑스 극우파들이 늘 입에 거품을 물고 잔다르크를 되뇐다는 것이다.
이 처녀 전사의 생몰일(生沒日)은 프랑스 극우파가 제일 설치는 날이다. 이런 날 누런 피부를 하고 프랑스 남부의 도시를 배회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위대한 프랑스의 주먹질, 발길질을 당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콩피에뉴에서 잔다르크를 체포한 건 프랑스 국왕을 싫어했던 부르고뉴 사람들이고 루앙에서 잔다르크를 처형한 건 프랑스 국왕이 싫어했던 영국인들인데, 잔다르크를 숭배하는 프랑스 극우파가 표적으로 삼는 건 부르고뉴의 프랑스인도 해협 건너의 영국인도 아니다. 만만한 아랍인, 흑인, 동양인이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흘긴다더니, 참.
잔다라는 타이 남자다. 타이라는 건 교과서 말투고 일상어로는 태국이다. 그러니까 잔다라는 태국 남자다. 그리고 <잔다라>는 내가 본 첫 태국 영화다. 내가 태국에 대해서 뭘 알고 있을까? 거의 없다. 그래도 태국에 대한 이미지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1960∼70년대 한국에서도 유행했던 킥복싱, 청렴하기로 소문났던 민선 방콕시장 잠롱, 쿠데타를 일삼는 군부도 그 앞에서 설설 긴다는 푸미폰 국왕, 에로소설 <에마뉘엘 부인>(파리발 방콕행 비행기 안에서 엽기적 성행위가 이뤄지지 아마?), 소년소녀 매매춘, 요즘 한국인들에게도 관광지로 각광받는다는 파타야, 일본 애호 열풍.
정말, 그러고보면, 20세기를 통해 태국은, 일본과 함께, 식민지-반식민지로 떨어지지 않은 희귀한 아시아 국가였다. 그걸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아, 10여년 전, 창이라는 출판사(이름이 맞겠지)에서 나온 태국 단편소설집을 읽었다. 아니, 정확히는 동남아 단편소설집이었던 것 같다. 태국 소설들이 책의 반쯤을 차지한. 소설들의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인상적인 소설 하나가 있기는 했다. 태국의 한 인텔리가 미국을 방문하려다가 비자를 받는 과정에서 미국인들에게 수모를 겪은 뒤 여행을 포기하고 태국에서의 미국의 의미를 곱씹어본다는 얘기다. 그 소설을 보니, 방콕의 미국대사관 앞에도 비자를 얻으려는 사람들의 줄이 긴 모양이다. 서울의 미국대사관 앞이 그렇듯. 이 말을 하고 보니 9·11 이후에는 그 줄을 못 본 것 같다. 비자 발급조건이 더 엄격해진 건지, 아니면 미국 가려는 한국인이 줄어든 건지.
그 소설집을 읽으며 받은 인상은 태국 사람들의 이름이 매우 길고 외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어려서, 러시아 소설을 읽노라면 소설이 끝날 때쯤 돼서야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욀 수 있었는데, 태국 이름은 러시아 이름에 댈 게 아니었다. 물론 단편이라는 사정도 있었지만, 소설을 다 읽고도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욀 수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푸미폰 국왕이나 잠롱 시장도 뒤에 꽤 긴 이름이 따라붙었던 것 같다. 그러니 잔다라라는 이름은 태국 이름치고는 매우 간단한, 외기 쉬운 이름이다. 아니 잔다라만이 아니라 <잔다라>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은 다 짧고 외기가 쉬웠다. 켄, 카우, 와드처럼. 정식 이름이 아니라 다 애칭이어서 그런 건지. 아무튼 이건 특이한, 예외적인 현상이다.
당장 어린 시절의 잔다라와 성년의 잔다라 역을 맡은 두 배우 이름만 해도 수위니트 판자마와트, 이카라트 사르수크 아닌가? 이거야말로 암기 회피성 이름 아니냐, 라고 말하려는 순간 나는 유럽중심주의에 깊이 젖어든 나 자신을 발견한다. 예컨대 라이너 마리아 릴케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나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나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나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이라는 이름들이 수위니트 판자마와트나 이카라트 사르수크보다 더 짧아서 내게 익숙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 <잔다라> 속의 편지나 신문에서 살짝 모습을 비치는 태국 문자도 그렇다. 본데없는 내 눈에는 그 글자들이 그림이나 무늬에 가깝게 다가왔지만, 유럽인들이 처음 한자를, 가나를, 한글을 보았을 때 받는 느낌도 그럴 것이다. 아니 동아시아인들이 처음 로마 문자나 키릴 문자를 접했을 때 받았던 느낌도 그랬을 것이다.
영화 <잔다라>는 더웠다. 오후 4시 조금 넘어서 시네코아엘 갔는데 그때 이미 8시 반 마지막회분밖에 남아 있지 않아(사전홍보가 잘됐나? 막상 영화를 보니 손님 많이 들 작품은 아니던데) 그걸 살 수밖에 없었고, 종로통을 얼쩡거리다가 영화관으로 들어가니 만원이었다. 스크린 속의 아열대에서 정사장면은 이어지고, 영화관은 사람으로 꽉 차고, 불은 또 얼마나 때주던지, 한겨울이라는 걸 도저히 실감할 수 없었던 토요일밤의 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