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쌀쌀하던 3월에 그곳에 갔다. 덕수궁 돌담길 대한문 옆에 차려진 분향소. 향을 하나 피우고 한동안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분향소 플래카드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눈물과 죽음, 이제는 멈춰야 합니다.” 아직 새잎을 틔우지 못한 두 그루의 플라타너스가 플래카드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불현듯 그 나무들이 고마웠다. 간간이 걸음을 멈춰 분향하고 가는 사람들이 고마웠다.
22번째 죽음.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가 깜짝 놀라 도리질쳤다. 이 일련의 죽음들에 대해 자본과 정부의 태도는 막장이다. 막장의 삼박자는 이렇다. 악덕한 회사는 사람을 ‘사용’하다가 입맛대로 잘라버린다. 정부 공권력은 최소한의 생존권을 위해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무력으로 짓밟는다. 2009년 쌍용차 공장 옥상에서 벌어진 끔찍한 진압에 대해 당시 경찰청장은 진압의 모범사례라고 자랑한다. 대통령 칭찬까지 받는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실종된 이런 ‘막돼먹은’ 태도에 변화가 없는 한 23번째 죽음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머릿속에서 ‘숫자’를 지워내려고 애썼다.
아, 그런데 정말이지, 이건 너무나 이상한 세계 아닌가. 한 회사에 다니던 사람들이 스물두명이나 죽었다. 그런데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조용한가? ‘죽음’에 대해 우리는 갈수록 무감각해져가는 것일까. 삶이 죽음이나 다름없어지는 음침한 매트릭스에서 혹시 우리는 ‘삶’을 빙자한 ‘죽음’을 살고 있는 것일까. 삶이 죽음과 별반 다를 바 없으니 이런 죽음들이 그다지 쇼킹할 것 없다는 것인가. 이 참혹한 죽음들 앞에서 어떻게! 나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저기요, 우리, 살아 있는 거 맞아요?
이 끔찍한 일련의 ‘사회적 살인’에 대해 이 사회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함께 슬퍼하는 것밖에 없다. 밤 버스의 차창에 비치는 내 얼굴 옆에 누군가의 얼굴이 가만히 다가와 슬픈 눈으로 밤거리를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누군가의 아빠이고 남편이고 아들이고 친구이고 오빠이고 조카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삶이 아니라 죽음쪽에서 흔들리면서…… 남겨진 가족들 때문에 아직도 울고 있는 것만 같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남겨진 안타까운 주저흔들…… 어쩌나…… 이 고통을 어쩌나.
‘쌍용차 희망지킴이’가 되어주시라. 지금은 100명이 조금 넘는 시민들이 희망지킴이를 자임하고 있다. 희망지킴이가 200명이 되고 500명이 되고 1천명이 되면, 최소한 23번째 죽음만큼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아주 가느다란 희망이라도 희망이 있는 한 인간은 살고자 하는 존재다. 외식 한번 하는 정도의 계좌후원이면 된다(수고를 덜기 위해 전화번호를 명기한다. 010-9270-0830). 죽음의 가파른 창문 앞에 선 누군가의 등을 돌려세워 삶쪽으로 데려올 수 있는 것은 우리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