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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그녀와 열애에 빠져 있다
김도훈 사진 오계옥 2012-05-30

엣지있는 배우 윤여정에게 바치는 찬가

윤여정에 대한 글입니다. 아니요. 윤여정을 인터뷰하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윤여정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아니요. 윤여정을 생존자로 떠받드는 글이 아닙니다. 아니요. 윤여정을 우리 시대의 아이콘으로 정착시키려는 음모를 품은 글도 아닙니다. 네. 이 글은 윤여정에 대한 글입니다. 네. 이 글은 윤여정에게 바치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게 맞습니다.

“미친년 나왔네.” 외할머니는 TV에 나오는 몇몇 여자들을 미친년이라고 불렀다. 기준은 한 가지였다. 그 여자가 이혼을 했느냐 아니냐.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혼을 한 여자들은 미친년이거나 팔자 사나운 년이었다. 특히 외할머니가 미친년이라고 부르던 궁극의 대상은 윤복희였다. 윤복희가 오랜만에 TV에 나와 특별공연이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저 미친년 좀 봐라”라는 외침과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복희는 당대에 드문 이혼녀에 무릎이 다 드러나는 짧은 치마를 남한 전역에 살포한 죄인이었다. 나도 어쩔 도리 없이 TV에 윤복희가 나오면 “할매. 미친년 나왔다!”라고 외치면서도 어쩐지 윤복희가 좋았다. 15살 소녀처럼 자그마한 몸으로 <여러분>을 부르며 눈물을 훔치던 격렬한 디바가 끝내주게 멋져 보였다.

90년대가 되자 외할머니의 미친년 리스트에는 또 한명의 여자가 올라갔다. 윤여정이었다. 왜 외할머니는 윤여정을 미친년이라고 불렀을까.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시 윤여정은 김수현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하희라와 신애라의 엄마를 연기하고 있었다. 내가 그 드라마를 빼놓지 않고 본 수많은 이유 중에는 윤여정의 목소리도 있었다. 희한했다. 어디서도 그런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침마다 쇠를 갈아서 물에 섞어 들이켜야만 겨우 나올 것 같은, 쇠로 만든 맷돌이 돌돌돌 갈리는 것 같은 목소리. 양지운과 배한성 같은 성우들이 스타로 활약하던 반듯한 90년대 TV의 세계에서 윤여정의 목소리는 홀로 둥둥 떠다녔는데, 조금만 익숙해지면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묘한 건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사랑이 뭐길래>의 윤여정은 상대편 집안의 엄마로 나오는 김혜자와 완벽하게 대척점에 자리한 존재였다. 김혜자처럼 사슴 같은 눈을 가지지도 않았고, 당대의 드라마가 그리던 전통적인 엄마의 모습도 아니었다. 지방에 사는 고등학생 남자아이에게 그 드라마의 윤여정은 상상 속 세련된 서울 아줌마의 모델처럼 느껴졌다. 내 옆에 있는 엄마와 어쩌면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 말이다. 그런데 왜 외할머니는 윤여정을 미친년이라고 불렀을까. 역시 이혼 때문이었으리라.그런데 지금 와서 되돌아보니 이혼 말고도 윤여정에게는 당대 어른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 만한 요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마녀였다. 김기영의 영화들과 <장희빈> 같은 드라마에서 윤여정은 당대의 관습을 온몸으로 밀어내며 자신을 불사르는 마녀였다. 게다가 생존자였다. 한국 연예계에서 마녀는 생존할 수 없다. 김기영의 첫 번째 뮤즈였던 이화시와 신중현의 뮤즈였던 김추자를 한번 생각해보시라.

<어미>

윤여정다운 근사한 컴백

윤여정이라는 배우를 이야기하면서 결혼과 도미와 이혼으로 이어진 공백기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윤여정은 1975년 가수 조영남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건너갔다.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최초 발화점을 거슬러보면 참말로 아까운 일이다. 그녀는 1966년 지금은 사라진 TBC의 공채 탤런트로 연기를 시작했고, 69년에 MBC 드라마 <장희빈>에서 장희빈을 연기하며 스타가 됐다. 이 장희빈이라는 역할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다. 김지미, 남정임, 이미숙, 전인화, 김혜수 등 오직 당대 최고의 스타만이 장희빈이라는 타이틀을 필모그래피에 삽입할 수 있다. 1969년의 윤여정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김기영이 찾아왔다. 지금에야 김기영이 한국 컬트영화의 유일무이한 화신처럼 여겨지지만, 당대의 김기영은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일 줄 아는 흥행감독이었다. 자신의 60년대 걸작 <하녀>를 리메이크해 <화녀>를 만들려던 김기영은 여주인공으로 윤여정을 택했다(마지막까지 강력한 후보였던 배우는 김자옥이다. 맞다. 김병욱 시트콤의 바로 그 김자옥 말이다). 1971년 개봉한 <화녀>는 그해 흥행성적 1위를 기록했다. 바로 다음해 김기영과 윤여정은 <충녀>를 만들었다. <충녀> 역시 1972년 한국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다. <장희빈>으로 폭발해 <화녀>와 <충녀>로 전성기를 맞이한 윤여정은 당대 다른 여배우들과 확연하게 달랐다. 60년대 트로이카를 이루며 70년대 초까지 인기를 이어가던 윤정희, 남정임, 그리고 71년 은퇴한 문희가 고전적인 아름다움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20대의 윤여정은 그 이전까지 어떤 한국 여배우도 보여주지 못한 ‘엣지’를 갖고 있었다. 1971년 <매일경제신문>의 ‘연예계 핫팬츠 붐’에 대한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연예계에는 핫팬츠가 제철을 만나 유행이 한창인데, 이들 연예인 중에서도 핫팬츠가 가장 잘 어울리는 가수로는 펄시스터즈, 김추자. 영화배우로는 오수미, 윤여정이 꼽히고 있다.” 이 기사는 1971년의 윤여정이 70년대의 아이콘으로 기억되는 펄시스터즈, 김추자, 고(故) 오수미와 함께 당대의 패셔니스타로 통했다는 증거다.

<화녀>

한창 빛이 반짝반짝 나던 윤여정은 별안간 사라졌다. 가수 조영남과의 결혼과 함께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를 키우고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 살았다. 맙소사. 나는 당시 윤여정이 대체 어떤 마음으로 가슴속에 이글거리는 광대의 불꽃을 잠재웠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결혼과 함께 미래의 가능성 따위 남편과 자식 먹일 압력밥솥 속에 꼭꼭 눌러 잠재우면 그만이라는 양 은퇴 선언을 해버리는 여배우들에 대한 원망을 도무지 떨칠 길이 없다(대표적인 경우로 심은하를 이야기하고 싶으나, 그녀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자면 책 한권도 모자랄 테니까 여기서는 참아야겠다).

윤여정은 1978년 미국 현지에서 <코메리칸의 낮과 밤>을 찍었으나 별일없었다. 진정한 컴백은 1985년에 김수현이 글을 쓰고 박철수가 연출한 <어미>(혹은 <에미>로도 알려져 있다)로 실현됐다. 가히 윤여정다운 컴백이었다. 그녀가 <어미>에서 맡은 역할은 인신매매당해 집단윤간당한 뒤 자살한 고3 외동딸의 복수를 위해 면도칼과 쇠사슬과 염산을 다양하게 활용해 인신매매범들을 모조리 짓밟아버리는 어미였다. 물론 <어미>가 70년대 미국에서 터져나온 익스플로이테이션 슬래셔영화들, 특히 <왼쪽 마지막 집>(1972)과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1978)의 영향을 뒤늦게 받아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윤여정이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유사성에 대한 논의는 뒤로 밀어두어도 좋다. <화녀>와 <충녀>의 윤여정에게 <어미>는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복귀 선언문에 가까웠으니까 말이다.

이혼이 없었더라면 윤여정은 아마도 굉장히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어미> 이후 충무로에서 그녀가 맡을 수 있는 역할들은 많았다. 그런데 1987년 조영남과 윤여정은 이혼했다. 윤여정이 시청자에게 이혼녀 딱지를 받고 TV드라마 출연에도 애를 먹고 있을 무렵, 히트곡 하나 없던 조영남은 <화개장터>로 잠시 국민가수가 됐다. 목청도 좋고 얼굴도 친근하게 생긴 남자가 TV에 나와서 동서의 화합에 대한 노래를 신명나게 불러젖히는데, 그를 버리고 미국으로 넘어갔던 년이 다시 드라마에 나온다고? 외할머니는 그래서 “미친년”이라고 했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여러 번의 이혼과 스캔들로 60년대 한국을 들었다 놨던 가수 이미자에게는 왜 미친년이라는 상표를 붙이지 않았는지가 궁금해지긴 한다. 그래도 이미자에게는 <동백아가씨>가 있다. <화녀>와 <충녀>와 <어미>의 윤여정은 (이미자가 가진) 세월을 넘나드는 원숙한 엄마의 이미지가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중년의 여배우가 가질 수 있을 법한 완충장치가 윤여정에게는 없었던 셈이다. 당시 <경향신문>은 윤여정과의 인터뷰 마지막 문단에 이렇게 썼다. “요즘은 목소리가 많이 쉬었으나 한때는 요염한 장희빈 역으로 인기를 모았었다.” 청춘은 과거형이었고 걸걸해진 목소리만이 남았다.

<하녀>

이것도 윤여정이고 저것도 윤여정이다

뭐, 그녀가 다시 궤도에 오르게 된 이야기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절친한 친구인 김수현의 드라마들이 윤여정을 구원했고, 새로운 작가 인정옥과 노희경이 윤여정의 진가를 알아봤고, 윤여정의 나이와 세월의 흐름이 윤여정 자신을 구원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거의 완벽하게 친근해지고 또 무뎌지는 다른 한국 중년 여배우들과는 달리 윤여정은 김기영의 페르소나로 존재하던 시절의 엣지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 이유 또한 모두가 알고 있듯이, 임상수라는 또 다른 (그녀 표현에 따르면) ‘또라이’ 덕분이다. 사실 내가 윤여정의 <화녀>와 <충녀>를 본 건 뒤늦은 90년대 말이었다. 김기영 감독에 대한 재평가가 여기저기서 폭발하던 시절이었다. 무시무시했다. 그다지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조약돌만 한 여자가 화면에서 입술을 깨물고 파르르 떨어대는데 아주 환장하게 멋이 있었다. 김수현 드라마에 걸걸한 목소리로 등장하는 저 차가워 보이는 아줌마가 한때는 이렇게 멋진 여자였다고? 오해 마시라. 나는 김수현 드라마의 윤여정도 끝내주게 멋졌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나이가 들었고 피부가 좀 상했는데도 오랜만에 얼굴을 쫙 펴고 복귀한 다른 중년 스타들보다 훨씬 세련된 맛이 있었고, 그건 연기가 아니라 타고난 세련됨이었다. 그래도 세월이 윤여정의 날을 조금씩 깎아내리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드라마의 세계에서 주어지는 역할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니까.

임상수는 깎여내리는 윤여정의 날을 막아세웠다. 2003년 <바람난 가족>, 2009년 <하녀>, 2012년 <돈의 맛>으로 이어지는 세편의 ‘임상수 장르’ 속에서 윤여정은 무시무시하다. 특히 <돈의 맛>의 백금옥 역은 “몸이 원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살겠다”던 <바람난 가족>의 병한 역을 얌전한 양갓집 규수로 보이게 만들 지경이다. 백금옥은 세상을 돈으로 지배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재벌가의 안주인이다. 남편과 아이들은 더 많은 돈과 권력을 위한 노리개에 불과하다. 돈은 그녀의 신앙이다. 누가 맡았더라도 괴물 같은 역할이었을 거라고? 그렇지 않다. 이 역할을 진정한 구경거리로 만드는 건 윤여정이라는 존재다. 우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재벌가 안주인을 연기한 여배우들을 몇몇 알고 있다. <로열 패밀리>의 김영애, <천일의 약속>의 이미숙, <마이더스>의 김희애는 가장 최근의 사례다.

<여배우들>

윤여정이 연기하는 백금옥은 어딘가 다르다. 임상수 감독이 윤여정을 캐스팅한 이유는 영화를 보다보면 정말로 분명해지는데, 그건 윤여정이 우리가 재벌가 안주인으로부터 떠올릴 법한 평상적 이미지와는 완벽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윤여정이 연기하는 백금옥에게 늙은 여우의 앙칼진 매력은 없다. 대신 그녀에게는 늙은 너구리의 의뭉스러움이 있다. 그리고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과 피로함이 얼굴 가득 쓰여 있다. 특히 김강우와 벌이는 정사장면은 윤여정이기 때문에 웃기고 통렬하다. 두 다리를 허공에 쫘악 뻗고 질펀하게 신음을 내지르던 백금옥은 아침이 오자 여느 아줌마들이 입을 법한 추리닝을 입고 손을 허공에 쫙 뻗으며 “어우 시워언하다!”고 외친다. 이런 건 윤여정이 아니면 할 수도 없고, 흉내낸들 소용없는 연기다.

더 재미있는 건 <돈의 맛>을 보고 나서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를 봐도 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윤여정은 이 드라마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던 집의 지적장애인 아들을 대신 키우며 늙어온 욕쟁이 할망구를 연기했다.

<돈의 맛> 직전까지 인터넷에서 윤여정은 ‘국민할매’로 불렸다. 그런데 말이다. 사람들은 <돈의 맛>과<내 마음이 들리니?>의 윤여정을 두고 놀라운 변신이라거나 카멜레온이라는 구태의연한 표현을 덧붙여 찬사를 보내는 일은 없다. 이것도 윤여정이고 저것도 윤여정이다. 윤여정은 기묘할 정도로 세간의 평가로부터 자유롭게 영화와 TV를 경계로 극단의 역할들을 오간다. 그건 어쩌면 윤여정의 투철한 연기론, 혹은 직업관과도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내 마음이 들리니>

리얼리티라는 연기, 연기라는 리얼리티

달시 파켓이 증언한 임상수 감독의 말에 따르면 윤여정은 첫 번째 컷부터 모든 것을 다 꺼내놓는 배우다. 이유는? 집에 일찍 가서 쉬고 싶기 때문이다. 그녀는 <황금어장-무릎팍 도사>에 나와 집수리할 비용이 모자라서 <바람난 가족>에 출연했다고 했다. 지난주 <씨네21>과 인터뷰에서는 “배우가 논리를 논하는 게 싫다”고 했다. “제일 싫은 건 현장에서 새벽 3시에 감독이랑 논쟁하는 애들”이라고도 했다. “왼쪽으로 넘어지는 게 감정상 안 좋다. 오른쪽으로 넘어지는게 낫지 않겠나 그러는데 아주 돌아버려요. 오른쪽으로 넘어지나 왼쪽으로 넘어지나 거기에 무슨 감정이 있겠어요. 그런 애들 진짜 때려주고 싶어.” 자, 분명 윤여정은 메소드 연기자는 아니다. 그녀에게 연기는 예술인 동시에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이다. 맙소사. 그녀는 희귀하다.

그런 면에서 윤여정은 나에게 영국 배우 헬렌 미렌을 연상케 한다. 헬렌 미렌은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출신의 훈련받은 배우다. 메소드 액팅과 완벽하게 정반대에 위치한 영국식 클래식 액팅의 후예라는 의미다. 클래식 액팅에서 중요한 건 순간에 몰입하는 테크닉이다. ‘컷’ 소리가 나는 순간 최선을 다해 역할에 몰두하고, ‘컷’ 소리가 나면 그 즉시 역할에서 빠져나올 줄 알아야 한다. 할리우드식 메소드 액팅과 영국식 클래식 액팅의 전쟁은 이미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에서 우리 모두 낄껄거리며 지켜본 적이 있다. “그냥 연기를 하라고! 연기를!”이라 외치는 로렌스 올리비에와 맡은 캐릭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며 촬영을 질질 끄는 마릴린 먼로의 전쟁 말이다.

헬렌 미렌과 윤여정 이야기를 하다가 잠깐 다른 곳으로 새나가버렸다. 헬렌 미렌은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 출신이었지만 한동안 ‘인텔리 남성을 위한 요부’라는 별명으로 불린 70년대의 섹스심벌이었다. 우리는 틴토 브라스의 <칼리귤라>와 <롱 굿 프라이데이>와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에서의 헬렌 미렌을 기억한다. 그녀는 전형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의 소유자는 아니었고,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난 내가 안 예쁜 걸 안다. 정말 멋지고 섹시한 것, 마릴린 먼로가 가진 그런 것을 나도 사랑하지만 나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내가 가질 수도 없는 종류다.” 그건 어쩌면 김기영의 영화들에 출연하던 시절의 윤여정이 품었을 법한 마음이다. 당대의 정윤희와 남정임이 가진 것을 윤여정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윤여정에게는 전형적이지 않음으로써 진정으로 열병을 불러일으키는 섹시함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세월을 통과하며 살아남았다. 헬렌 미렌이 살아남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윤여정을 만난 적이 있다. 만났다기보다는 잠시 지켜봤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지난해 말 이재용 감독은 태블릿PC 광고를 위한 ‘시네노트’ 단편을 장편으로 확장하는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영화를 촬영했다. 기자 역할로 카메오 출연하기 위해 잠깐 들른 강남의 스튜디오는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이재용 감독은 미국에서 원격으로 현장을 지휘했고, 감독과 친분있는 배우와 스탭들이 정신없이 스튜디오를 뛰어다녔다. 스튜디오 옆에 위치한 로비에 여왕벌이 있었다. 출연진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여왕벌을 중심으로 앉았다. 여왕벌은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게 뭐야 진짜. 완전 아사리판이잖아. 감독은 또 어디 갔어? 뭐? 미국에서 원격으로 영화를 촬영한다고? 그게 말이 돼?” 그런데 카메라는 쉴새없이 불평하는 윤여정을 계속해서 멀찍이서 담고 있었다. 윤여정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날 이재용 감독은 윤여정으로부터 최고의 연기를 뽑아냈을 것이다. 리얼리티라는 연기. 혹은 연기라는 리얼리티.

<돈의 맛>

사실 윤여정에게서 연기와 리얼리티를 구분하는 것은 더이상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에서 윤여정처럼 진짜 같은 연기자를 알지 못한다. 동시에 윤여정만큼 호사스럽게 글래머러스한 스타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윤여정이라는 배우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한다. 그건 곧 사랑이 아니라 열애가 되어버리고 마니까. 애송이들은 이해하지 못할 미친년과의 열애. 디바와의 열애. 마녀든 디바든 뭐든, 그 모든 게 그저 직업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그런 여자와의 열애. 당신도 지금 윤여정과 열애에 빠져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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