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라고 시작하는 얘기를 꺼냈다가 그 시점이 무려 15년쯤 전이었다는 사실에 당황할 때가 있다. 피터 러브시에 대해 설명하려다 보니 그렇다. 옛날에, 그러니까 15년쯤 전에 가장 좋아하던 미스터리 작가 중 하나가 바로 피터 러브시였다. 해외여행을 갔다가 설레는 마음으로 갓 발간된 <블러드하운드> 하드커버를 사온 기억이 선명하다. 무용한 개인적 추억담까지 꺼내가며 옛날 운운하는 까닭은 새로 출간된 <다이아몬드 원맨쇼>를 읽다가 그 올드패션드함에 웃음이 나서다. 한국에서 이제 출간되었다고 해도 1992년 책이다. 지금 와 읽으면 70년대 소설 같이 멀어 보인다. 팬암항공기니 하는 추억의 고유명사들이 등장해서만은 아니다. 572쪽인 이 책의 사건 진행속도는 더디기 짝이 없다. 그것도 이유가 있다. 허리가 50인치라는 피터 다이아몬드가 주인공이니 빨리 움직이기란 불가능하다.
<다이아몬드 원맨쇼>는 피터 러브시의 ‘피터 다이아몬드 시리즈’ 두 번째 책이다(시리즈 전작을 읽지 않아도 즐기는 데 무리가 없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경찰을 그만둔 뒤 백화점 야간 경비원으로 살고 있는 다이아몬드는 어느 날 일본인 소녀가 숨어든 사건 때문에 해고당한다. 일본인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뿐더러 자폐증상이 있고, 실직자 다이아몬드는 소녀의 가족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한다. 아동보호단체에 보내진 소녀는 영 입을 열지 않고, 덩치가 산만 한 중년 남자 다이아몬드는 주변 사람들의 의혹어린 눈길(가장 나쁘게는 아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의구심이 어린)을 물리치느라 기운을 쏙 뺀다. 그 와중에 어머니를 자처한 여인이 소녀를 데리고 미국행 비행기를 타버리자 다이아몬드는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다이아몬드가 소녀를 데리고 출연한 방송을 본 일본 스모선수는 수사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한다.
피터 러브시의 책 중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대표작들이라고 하면 ‘크리브 경사’ 시리즈 마지막권인 <마담 타소가 기다리다 지쳐>와 1982년에 발표한 <가짜 경감 듀>. 특히 <가짜 경감 듀>는 유머 미스터리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걸작인데 아마 죽을 때까지 ‘가장 좋아하는 미스터리소설 베스트10’을 꼽으라면 <가짜 경감 듀>만큼은 빼먹지 않을 것 같다. 러브시의 유머감각이라는 건 영국 아저씨의 그것인데, 경찰로서 무례할 정도의 강인함을 갖추었다기보다는 선량하고 바른 사람이라 배꼽을 잡게 만드는 유머는 여기 없다. 빽빽한 글줄 사이로 무심한 듯 흘려넣은 말이 피식 웃게 만드는 정도다.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정신 쏙 빼놓는 현란한 트릭이나 반전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지만 피터 다이아몬드라는 믿음직한 캐릭터를 중심에 두고 펼쳐가는 드라마가 탄탄하다. 일본인과 일본 문화에 대해 묘사하는 대목이 90년대 초답다는 점은 이 책의 아쉬운 점이지만 그 덕에 종장의 감동이 배가된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긴 장마철에 느긋하게 집에서 읽을 만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