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두나_나는 쥐뿔도 없는 배우고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하면 한물갔나보다 소리나 들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길로 가고 싶은 충동이 있어요.
고현정_우리가 어떤 활동이나 작품을 할 때 즉각 반응하는 분들이 대중의 전부는 아니라고 믿어. 내가 어디 가서 배두나와 아는 사이라고 표는 안 내도 마음 깊이 믿고 어려울 때 힘이 돼주고 싶듯, 더 조용하고 점잖은 대중이 존재할 거라는 생각을 해. 왜냐하면 나 역시 대중이니까. 내가 지금 예능프로그램을 하는 것도, 그때그때 소리를 내지 않아도 본인의 생활을 묵묵히 하면서 끝없이 에너지를 주는 그분들을 믿고 하는 선택인 거지. 두나씨가 방금 이야기한 것이 척하려는 겉멋이 아니라 숙고와 경험 끝에 나온 행동이라는 걸 아는 분들이 두텁게 존재한다는 거죠. 사실 그런 안목을 가진 배우 한명이 길러지기까지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삶을 거는 직업이란 표현까지 하기는 거창하지만 ‘투영’이란 단어로는 좀 부족할 정도로, 배우는 자기 상태가 다 나타나는 일이니까.
배두나_모든 사람이 살아온 과정이 얼굴에 보이지만 배우는 클로즈업이 여기까지 들어오고 스크린은 엄청나게 크니까요. 이따금 케이블에서 십수년 전 드라마를 방영하는 데 거기서 참 맑은 얼굴을 하고 있는 연기자가 요즘은 탁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놀랄 때가 있어요.
고현정_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배우는 연기 외적인 부분에서 삶의 집중도를 올려야 한다고 느껴. 취향 아닌 일까지 일부러 할 건 없지만 문화생활이든 인간관계든 일상도 연기하는 시간만큼 치열하게 해야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아. 여배우의 일은 한쪽에 치중된 면이 있어서 균형을 잡지 않으면 편협한 사고를 가질 수밖에 없으니까. 자기 삶은 엉망인데 영화에서는 뛰어난 연기를 하기도 어렵고, 설령 그게 된다 해도 역시 발칙한 일 아닐까. 신인일 때는 서툰 대신 순수함이 있다면, 연차가 쌓이면 능란함을 얻고 대신 순수를 잃을 텐데 그건 세상 탓도 아니고 남 탓도 아니야. 내가 물들 시간이 있었으면 물들지 않도록 노력하거나 물을 뺄 시간도 있었을 거라는 거지. 그걸 못한 건 게을러서, 아늑하고 편치 않은 데를 피해서인 거예요. 그렇게 자기랑 밀착된 직업이니까 선배나 배우 아닌 사람들이 툭툭 던지는 연기 조언도 걸러서 들어야 하는 것 같아. 나 같은 또라이는 걸러 듣고 감독님한테 반문도 하지만 아직 그러지 못하는 친구들은 하라는 대로 하기 쉽거든. 그건 위험할 수도 있어.
배두나_전 20대 때는 시키면 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를 지키게 됐어요. 일을 하다보면 촬영이 원치 않는 분위기로 흘러갈 때도 있고 내 열의가 호응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니 나를 지키고 캐릭터를 지켜야겠다는 정서가 생기더라고요. 건방진 말이기도 해요. 영화는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니까 눈에 힘을 더 주라면 주는 게 맞겠죠. (웃음)
고현정_두나씨가 영화를 찍고 개봉하는 중에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도 자기를 지키는 일이죠.
배두나_이번에 런던에서 영어 공부한다는 계획은 엄마를 포함해 다들 반대했어요. 비행기값이 얼만데…. 내가 나를 믿긴 하지만 혼자 억지부리는 것 같고, 누가 도전해보라고 밀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눈물이 날 때도 있어요. 배운 말이 제대로 안 나오면 내가 여기 왜 와 있나 밤에 괴로워하다가 이튿날 또 일어나서 레슨 받고. 하지만 그냥 해요. 카메라에 빠져 수집하고 사진 배울 때도 다들 사치스럽다고 했지만 결국은 모델, 배우 일에 도움이 됐어요. 포토그래퍼가 와이드로 당기는지 망원으로 찍는지 알게 되니까요. 예컨대 망원으로 당기는 클로즈업이니까 손을 더 올려야겠구나 하는 식으로. 동영상 편집도 배우고 나니 연기의 호흡에 참고가 됐어요. 언젠가는 다 쓸모가 있더라고요.
고현정_부러워요. 내 연기는 편집점이 안 보인대요. 난 그냥 막하고 있는 거야. (좌중 폭소)
배두나_그런데 언니는 그게 너무 매력이에요!
고현정_그래, 그걸 그냥 내 매력으로 하려고. (웃음)
배두나_창피해서 영어 공부한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코리아> 개봉으로 매체 50여곳과 인터뷰를 하는데 이야기가 그리로 흘러가니 거짓말은 못하겠더라고요. 언어는 재미로 배우는 게 아니라 공부는 힘든데 날 표현하는 도구로서 배우는 거예요.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찍으면서 너무 답답했거든요. 원래 나는 훨씬 괜찮은 사람 같은데 영어만 하면 너무 바보 같은 거예요! (좌중 폭소) 심지어 사람들 붙들고 말했다니까? 나 한국말로 이야기하면 교양있다고. 우하하. 연기야 대사가 있으니 그럴듯하게 할 수 있지만 거기서 대사가 없는 일상을 몇달을 사는데 배고파 배불러만 하고 살 순 없잖아. 감독님이랑 철학적인 이야기도 하고 싶은데(웃음) 그걸 못하는 자신이 너무 싫어서 차마 베를린에서 곧장 한국으로 올 수가 없었어요.
고현정_이런 이야기를 좀 편하게 해야 하는데 우리는 어째 이런 말하면 “나중에 네가 영어를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보자”라는 반응이 많아서 무서워요. 뭘 자꾸 두고봐. 우리가 남한테 보여주려고 사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세상은 못 바꾼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는 늘 이렇게 말해요. 내가 지금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고집부리는 게 아니라 내 생각이 틀리거나 아주 나쁜 게 아니라면 솔직한 내 모습 그대로 일하고 싶은 거다. 그러니까 이런 나를 원치 않으면 쓰지 마세요.
배두나_흐흐, 귀여워….
고현정의 선물
to . 배두나 “두나가 좀… 시(詩) 같지 않아요?” 선물에 실린 뜻을 좀더 캐물을 생각이었는데 한마디로 그만 납득해버렸다. 색색 장정의 시인선집을 통째로 들고 온 고현정은 배두나를 감정이 응축된 시어에 비했다. 간결하고 밀도 높은, 그래서 구구한 설명이 스스로 낯을 붉히게 만드는. 선집 중에서도 고현정이 특히 좋아한다고 덧붙인 장석남, 조인호 시인의 책을 뒤적이던 배두나가 말한다. “영화나 드라마는 잘 안 보고 듣는 거, 읽는 거 좋아해요. 직접 그림을 보여주는 건 별로인데 이상하게도 음악도 그림이 그려지는 음악이 좋고 책도 이미지가 떠오르는 책이 좋아요.” 얼추 과녁을 맞힌 선물인 듯하다. 비행기 여행에 가져갈지 몰라 아담한 판형을 골랐다는 고현정의 말을 듣고 있자니, 배두나가 이 색종이 같은 시집들로 학을 접어 날리는 환상이 떠올라 흐뭇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