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시간 동안 진행된 통합진보당 전국운영위원회는 한마디로 ‘공포’였다. 작은 휴대폰 액정 앞에 펼쳐지는 장면 하나하나는 누구의 말이 맞냐를 떠나 그 자체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줄담배를 피우며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생각해봤지만 이미 머리는 돌처럼 굳어 있었다. 간신히 진정용 주문을 되뇌며 잠을 청했다. ‘세상에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 따위는 없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하루가 지나니 머리가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잔뜩 술에 취한 운동권 간부 선배가 학생회관 자판기를 부셔 동전을 꺼내 라면을 사먹으러 가면서 했던 말은 “괜찮아, 어차피 다 우리 거잖아, 학생들이 주인이지”였다. 물론 진지한 어투의 말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선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선배와 같이 먹던 라면은 계속해서 목에 걸렸다.
또 다른 장면도 떠올랐다. 난생처음 가입한 학회의 첫 세미나에서 한 학년 위의 선배가 책 한권을 툭 하니 우리 앞에 던지며 대뜸 하는 말이 “지금까지 너희들이 배운 건 다 거짓이야. 다음 시간까지 이거 읽어 와”. 황당해하는 우리 표정에 오히려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맞서던 선배의 얼굴을 보며 다시는 이 세미나에 참석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나의 대학생활은 ‘학생운동’과는 인연이 없었다. 1학년 때 몇번 대규모 집회에 참석한 것 외엔 별다른 기억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한 것만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내가 침묵할 때 ‘정의로움’을 이야기하던 그들, 내가 연인과 영화관으로 도망갈 때 가두투쟁에 나섰다가 머리가 깨져 돌아오는 그들을 보며 죄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렇게 대학 4년 내내 뭔가 계속 찜찜한 상태였다.
그 찜찜한 느낌이 통합진보당 전국운영위원회를 보며 다시 온몸을 감싸왔다.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쳐대며 회의를 방해하는 이들을 보며 마냥 분노할 수만은 없었다. 마냥 대놓고 손가락질을 할 수가 없었다. 이정희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4년간 가장 낮은 곳에 늘 있었던 그에게 쉽게 칼을 들이댈 수 없었다.
사태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결론이 날지 아직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비례대표 총사퇴 결의안이 전국운영위에서 통과되어 한 고비는 넘겼지만 오늘 비례대표 당선자 중 한명인 김재연씨는 사퇴 거부 의사를 밝혔다. 아, 그러고 보니 대학 1학년 때부터 거의 모든 집회에 참석하며 열심이었다는 김재연씨에 대한 지인의 목격담이 문득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이런 젠장할, 20년이 지나도 찜찜함은 가시질 않는다.
해서 늦었지만 그들에게 이 말은 꼭 해줘야겠다. 정말 미안하다. 고개 돌렸던 것,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냥 가버렸던 것, 어려울 때 함께하지 않았던 것, 진심으로 미안하다. 그리고 딱 한 가지만 부탁하자. 부디 막다른 골목에 스스로를 가두는 일만은 하지 마시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는 가지 마시라. 그래서 죽음이 아닌 삶을 택하시라. 그래서 뒤늦게라도 이 미안함을 갚을 수 있는 기회를 꼭 좀 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