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6~7년 전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각한 우울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하루 종일 밖에 나가지 않고 TV 모니터만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다가 (MBC <강력추천 토요일>의 코너이자, <무한도전>의 전신인) ‘무모한 도전’이라는 정말 ‘무모한’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쫄쫄이 옷을 입은 일군의 남자들이 도전해봐야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될 것 같은 종류의 대결을 만들어 도전하고는 매번 실패하는 이상한 컨셉의 프로였다. 그런데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나를 결정적으로 미치게 만든 에피소드는 4회인 ‘목욕탕 물 빼기 도전’이었다. 영업이 끝난 목욕탕에 러닝셔츠와 팬티 등으로 저렴하게 차려입은 멤버(유재석이 MC였고 박명수, 노홍철, 정형돈은 단골 출연자였으며 나머지는 매우 유동적으로 채워졌다)들이 욕탕의 자연배수에 맞서 바가지로 물을 퍼내는 도전 과제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더니, 정신력을 기른다며 열탕에 들어가질 않나 맹렬하게 물 퍼내기 연습을 해가며 도전하기 전에 진을 다 빼고 있었다. 싱겁기 이를 데 없는 도전이 막상 시작되니 멤버들도, 보는 내 마음도 이상하게 진지해지기 시작했고 또 그들이 이기기를 간절히 빌게 됐다. 이 도전은 ‘지하철과 달리기 경주’ 편과 함께 ‘무모한 도전’의 전설이 되었고 ‘물 펌프와 물 채우기 대결’이라는 시퀄까지 만들어졌다. 이 에피소드를 본 이후 내 방 TV는 <무한도전>에 고정되었고 내 방에 놀러온 선배는 “네 방은 <무한도전>만 나오는 이상한 나라 같아”라는 평을 남기고 떠났다. 하지만 그녀도 몇달 뒤 <무한도전>의 광빠가 되었다.
도전 성공은 일종의 맥거핀
꼬르륵 꼬르륵 물이 빠지는 수챗구멍에 맞서 탕 안의 물을 퍼내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못해 처연한 맛이 있었다. 그리고 매 도전이 끝날 때마다 MC 유는 지나치게 송구스러워했다. 반복되는 실패와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의지 그리고 또 다른 실패로 이어지는 이 ‘무모한 도전’은 ‘무의미함’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다. 기를 쓰고 뭔가를 성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 사회의 강박에서 벗어나 그러한 노력을 한없이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공간이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경제적인 가치가 없어도, 학문적인 성과가 없어도, 100번을 실패하더라도 언젠가는 한번쯤 이길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그냥 도전하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교과서적 격려로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공 여부보다 실패하는 과정이 더 재미있었다. 우글우글 모인 남자들의 수다는 목표의식을 잃고 방황했고 진짜 성공이 목적이라면 저런 구성원들로 멤버를 구성할 필요도 없었다(정말 성공과 기록을 원한다면 <출발 드림팀>을 보는 게 나았다). 그러니까 이 프로에서 ‘도전 과제 성공’이나 ‘기록 달성’은 일종의 맥거핀인 것이다. ‘급정거하는 버스 안에서 중심잡기’(‘무모한 도전’ 8회) 같은 에피소드에서 도전의 대상은 심지어 물리법칙이 아닌가? 휘청거리는 쫄쫄이들의 몸짓을 바라보다가 이 프로는 모든 종류의 ‘힘’에 저항하는 정신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라는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검열과 제재의 대상이 된 언어
그것이 망상이었던 때가 좋았던 것 같다. 7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한 프로그램의 코너였던 ‘무모한 도전’이 <무한도전>으로 독립했고 들쑥날쑥하던 멤버들이 정예 멤버들로 고정되었으며 하하는 공익요원 생활을 마치고 복귀했다. 그리고 정권도 바뀌었다. 국민들이 촛불 들고 나와서 들으라고 목청을 높이는 소리는 노래처럼 흘려듣고 눈물을 흘리며 감상에 빠지시는 분이 언론에는 사뭇 예민하시어 자신의 ‘시중’을 잘 듣는 이들을 방송계의 요직에 꽂아두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강하고 센 것에 도전해왔던 <무한도전>은 예의 그 촌철살인 자막으로 그분의 업적과 정치적 비전 그리고 새로운 방송 환경을 풍자했다. 절묘하고 아름다웠지만 마음 아팠다. 흙이나 물이나 연탄이 아닌 우리의 일상을 억압하는, 진짜로 싸워야 하는 대상이 생겼다는 사실이 요즘 표현으로 ‘웃펐다’. 그들의 언어가 저속하다는 이유로 검열과 제재의 대상이 되었지만, 우리는 칼이 진짜로 겨누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재방송을 볼 수밖에 없는 요즘 지난 정권에 만들어진 <무한도전>을 보다가 지금보다 더 자유로운 말의 향연을 보았다. 낄낄대고 있다가 우리가 빼앗긴 게 무엇인지를 문득 깨닫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때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 왜 지금은 문제가 되는가? 우리가 지나치게 ‘도덕적인’ 정권 아래 살고 있기 때문일까?
진정한 무도빠의 바람
13주째 <무한도전> 없는 주말을 보내고 있다. 7년 전 나의 우울을 치유해주었던 <무한도전>이 이제는 우울의 원인이 되고 있다. ‘무빠’들은 금단현상 때문에 거의 죽을 지경이다. 지난 주말 4.8%까지 떨어진 <무한도전>의 시청률을 두고 주요 일간지가 일제히 ‘긴병에 효자 없다’, ‘긴 파업으로 팬들의 사랑이 식어가고 있다’며 <무한도전>의 귀환을 촉구하는 기사를 공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야무야 방송이 복귀되길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가 진정한 ‘무빠’임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한도전>이 지켜온 ‘무한’한 ‘도전’ 정신과 그것을 저지하는 실체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무빠’들은 단순히 <무한도전>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한도전>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제작 환경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토요일 오후 6시30분에 재방송이 아닌 컬러바나 암전상태가 송출되기를 기대해본다. 그것이야말로 표현의 자유가 사라진, <무한도전>이 더이상 ‘무한’의 도전이 될 수 없게 만드는 현재의 방송 환경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시청각적 이미지일 테니 말이다.
내가 사랑한 캐릭터 박명수
웃기는 건 피곤해 박명수는 <무한도전>에서 가장 많은 별명을 갖고 있는 인물일 것이다. 나의 이성은 ‘유느님’을 섬기지만 나의 감성은 ‘박거성’을 추종한다. 유재석이 예능인이 보여줄 수 있는 긍정성의 최대치를 보여준다면 박명수는 부정성의 한계치를 보여준다. 이 ‘찮은이 형’에게 끌리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노동하는 육체의 피로감을 유머로 승화시킨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는 노동을 거부하는 하찮고, 편찮고, 귀찮은 육체를 무가치한 것이 아닌, 웃음을 유발할 수 있는 육체로 전환시켰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무척 귀찮고 꺼리는 표정으로 모든 도전의 첫 번째 타자를 도맡아온 ‘고유명수’로서 그가 해온 역할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모든 태도를 애정어린 마음으로 ‘씹어준’ 동료들의 무한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