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범 Y_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는 수도 없다. 뒷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경위는 기자, 경찰, 검찰, (정신과)의사들을 통해서였다. 직접 “내가 만났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으니 어쩌면 그 직종에서 돌고 도는 도시전설 같은 것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건으로 특종을 했던 신문사 입사 동기가 들려준, 너무 끔찍해서 있는 그대로 말해줄 수 없다며 머리 다리 다 잘라 잔뜩 토막친 이야기조차 잔인했다.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야 했던 교도관은 한동안 곡기를 끊었다던가. 그로부터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Y_의 이름은 과거가 되었다. 새로운 연쇄살인자들이 등장했다. 이제 연쇄살인이니 프로파일링이니 하는 단어들은 일간지 사회면에서 자주 출몰한다.
‘그들’. ‘그들’은 어떤 이들일까. 양육환경에 대한 분석을 대표적으로, ‘그들’을 어떤 범주로 묶고 한정하려는 움직임을 볼 때면 그건 그저 인간의 바람이 아닐까 궁금해진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 ‘그들’은 그렇게 되었고, 나는 그렇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얻고 싶을 뿐이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좀비>는 오싹하다, 소름돋는다. 어쩌면 ‘그들’과 우리를 가를 그 어떤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를 탐색하는 손길이 집요해서다. <좀비>는 밀워키의 식인귀라고 불렸던 연쇄살인범 제프리 다머를 모델로 한 소설로, 연쇄살인범 Q_P_의 내면을 훑어낸다. Q_P_는 살인하고, 시간하고, 시체를 좀비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밤중에 읽으면 곤란하다. 음산하게 너덜거리는 좀비가 되어가는 비린내나는 축축한 기분에 젖어든다. 이 소설 자체가 악몽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Q_P_가 살인을 저지른 뒤 호신용 부적으로 간직한 금니, 머리카락을 엮어 만든 팔찌의 그림을 굵은 선으로 그려넣었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할 외부적인 관점의 서술 대신 오로지 그 내면의 망상이 가지를 뻗어가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쾌락에 젖는 광경을 드러내는 내부적인 독백으로 일관했다.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상냥한 어머니, 그를 믿는 할머니, 성공한 누나들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이 흔쾌히 받아들일 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Q_P_의 비딱한 속내를 보여주기도 한다. 예컨대 “누나와 나 사이에는 늘 애틋한 감정이 있다. 적어도 그녀쪽에서는 그렇다.” 좀비 후보를 점찍어놓고 오랜 시간 관찰하며 흥분하고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실천해가는 과정은, 차갑고 이성적인 살인이라는 행위를 두려움으로 응시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뒤표지에 실린 박찬욱 감독의 추천사가 인상적이다. “악은 이토록 쉽고 간결하고 명쾌한 것이던가, 어리둥절해질 지경이다. 악의 화신이 된다는 건 전혀 어렵지 않더라. 타인들을 입체로 보지 않는 것, 오로지 자기만 들여다보는 것, 제 욕망만을 보는 것. 단순화, 평면화, 내면화, 그리고 단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