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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의 여왕

<웬디와 루시> <믹의 지름길>의 켈리 리처드 감독

켈리 리처드의 <믹의 지름길>은 전에 없는 여성주의 서부극으로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 수긍할 만하다. 서부극 안에서 여성의 자리는 늘 미비했거나 없었는데, 그녀의 영화 <믹의 지름길>에서는 그들이 사막의 한가운데에 선 진정한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점이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이 영화의 기원은 인물이 아니라 풍경이었다. 켈리 리처드가 <웬디와 루시>의 촬영 준비를 하며 경험했던 오리건의 사막 지대가 이 영화의 기원이며, 그 사막의 풍경을 체험한 이후에야 서부 시대 여성의 이야기가 풀려나왔다. 그러고 보면 켈리 리처드는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뒤집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 옛날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자신만의 로드무비를 한번 더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1994년 <초원의 강>으로 데뷔하여 선댄스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호평을 받았으니 데뷔작의 연도로만 본다면 켈리 리처드는 꽤 경력이 있는 감독이다. 당시 <초원의 강>은 테렌스 맬릭의 <황무지>와 흡사하다는 호평까지도 끌어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 그녀는 장편 연출작을 만들지 못했고 우리에게는 <올드 조이>(2006), <웬디와 루시>(2008), <믹의 지름길>(2010)을 거치며 최근에 비로소 각인되었다.

<웬디와 루시>

<믹의 지름길>

무엇이 그녀의 영화를 가치있게 만든 것일까. 이야기의 재미로만 따진다면 빵점이다. 켈리 리처드 영화의 이야기는 모자라거나, 없다. 가정을 박차고 나온 한 여인의 충동적인 여행길이 <초원의 강>이었다면, 두 친구가 자신들만의 캠핑장으로 놀러갔다 오는 조용한 여행길이 <올드 조이>의 이야기다. <웬디와 루시>는 웬디라는 여인이 루시라는 강아지를 데리고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알래스카로 가던 중 잠시 오리건에서 헤매는 이야기이고, <믹의 지름길>은 서부로 가던 중 사막에서 길을 잃고 낙오된 세 가족의 이야기다. 그녀의 영화에는 늘 이야기보다 앞서는 것들이 있는데 그게 풍경이며 풍경에 놓인 인물들이다.

애초부터 풍경을 다루는 솜씨는 정평이 나 있었지만 <웬디와 루시>부터는 그 풍경 안의 인물들이 더 역동적이고 유기적으로 변모한 것 같다. 영화는 드라마 구조를 되도록 멀리하고 미스터리 도 일으키지 않으며 단지 선형적인 흐름 속에서 진행될 뿐이지만 리처드 영화 속 인물들의 그 형상은 단지 거기 존재하는 것만으로 혹은 그 앵글 안에 자리잡고 앉은 서로의 육체적 거리감만으로도 기이한 긴장감을 뿜어낸다. 그 긴장감을 바탕으로 그들은 잠시의 여행을 끝내고 다시 돌아오거나 여전히 여행 중이다.

2000년대 이후 인상 깊었던 미국의 로드무비들, 예컨대 빈센트 갈로의 <브라운 버니>와 구스 반 산트의 <제리>는 영화의 감각화 방식에 신선한 충격을 일으켰다. 켈리 리처드의 영화는 그런 영화들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혹은 누구보다 그런 계보의 독립된 실천자다. 자동차건 마차건 움직이는 그 무엇과 누군가의 두 다리만 있으면 어떤 흥미로운 영화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켈리 리처드의 영화적 신기다. 그들은 초원이든 숲이든 한적한 골목길이든 사막이든 그 어디에서든 움직인다. 길 위에서의 그 모든 움직임의 흐름, 그것의 관심사가 그녀를 로드무비로 이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옛날에 빔 벤더스가 길의 왕이라 불렸던가. 지금은 켈리 리처드가 길의 여왕이다.

그녀의 사소한 비밀◆강아지

켈리 리처드에게는 중요한 동료 두명이 있다. 한명은 사람이고 또 한명은 동물이다. <올드 조이> <웬디와 루시> <믹의 지름길>의 이야기는 전부 조너선 레이먼드라는 시나리오작가와 공동작업을 거쳐 완성됐다. 한편 <웬디와 루시>에서 루시는 영화에 출연한 강아지인데 ‘그녀’의 데뷔작은 사실 <올드 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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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사진 EVERE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