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피조물>의 깨달음을 얻은 로봇 ‘인명’은 지난 2009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공식 트레일러에도 등장했다.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던 녹슨 로봇이 한 소녀(심은경)의 피아노 연주로 깨어나게 된다는 내용으로 독특한 컨셉과 영상이 눈길을 끌었는데, 사실 김지운 감독의 <천상의 피조물>이 이제야 개봉하게 된 것. 컨베이어 벨트에서 만들어진 공산품이 종교적 열반과 등가를 이룬다는 파격적 설정의 <천상의 피조물>은 영화사의 오랜 테마를 신선하게 변주하고 있다. 늘 장르를 옮겨다녔던 김지운 감독으로서는 첫 번째 SF 장르의 시도로 봐도 무방하다. 현재 미국 진출작 <라스트 스탠드>의 후반작업 중인 그가 다시 그 로봇을 만나기 위해 급히 귀국했다. 김지운 감독과의 인터뷰는 제작발표회가 열린 지난 3월12일에 이뤄졌다.
-워낙 오래전 작업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겠다. =2006년 6월경 크랭크업했으니 무려 7년 전이다. 영화 속 김규리가 그때는 김민선이었다. (웃음) 지금 미국에서 한창 <라스트 스탠드> 후반작업 중일 텐데 홍보차 급하게 귀국했다. 10주 안에 후반작업을 끝내야 한다. 그래도 어쨌건 <인류멸망보고서>를 완성한 두 회사와 임필성 감독에게 보답하고 싶어서 한주를 여기에 쓰기로 했다. 어떻게 보면 남이 갖다버린 자식 데려다가 씻겨주고 먹여주고 한 건데 그 기른 정에 보답해야 하지 않겠나. 후반작업 한주 덜한다고 작품이 더 좋아질 것 같지도 않고. (웃음) 이제 미국에 돌아가면 6주 정도 남는데 라스베이거스에서 인서트 컷도 찍어야 하고, 하여간 남은 기간 열심히 해야지 뭐.
-<천상의 피조물>은 원작이 있다고 들었다. =2004년 ‘과학기술창작문예공모전’에 당선된 박성환 작가의 단편 <레디메이드 보살>이 원작이다. 로봇과 로봇을 만든 초거대자본, 그리고 주지승과 파견된 수리공 네 사람의 이야기인데 상당히 철학적인 대화로만 이뤄져 있다. 거기에 인물을 더 넣고 입체감을 만들면서 ‘깨달음을 얻은 로봇의 소동극’으로 구성했다. 김규리가 가세하면서 불교계의 입장과 인명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강화했고, 조윤희가 뭔가 모티브를 제공하는 별도 에피소드의 인물로 등장하며, 김강우는 단순 기술자라기보다 회의하는 중간자적 시선을 가지고 있으면서 마지막에 가벼운 반전을 준다. 나는 거대한 두 세계의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화해를 모색하는 느낌으로 결론짓고 싶었다.
-‘인간을 위협하는 로봇’이라는 주제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블레이드 러너> 등 영화사를 통틀어 지속적으로 변주되는 테마 중 하나다. =인간이 만들어낸 대상에게 역으로 지배당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을 다뤄보고 싶었다. 거기에 보다 중의적, 다의적으로 테크놀로지의 오류가 오히려 인간이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까지 이른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로봇을 만든 회사에서는 인간의 능력과 철학을 넘어서는 고도의 로봇을 만들려고 ‘인명’을 만든 것이 아닌데 그러한 ‘고장’이 종교적으로는 고차원으로 그려진다. <블레이드 러너>의 사이보그도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 인명은 자신의 세계에 대한 회의도 있는 데다 그런 것까지 초월한 존재다. 어쩌다 발생한 ‘고장’이라는 모순이 화해와 도모의 시선으로 나아가는 걸 그리고 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컴퓨터 HAL의 위협은 그들이 자가발전을 한다는 공포다. 인명도 그러한 존재인데 그렇게 로봇이 열반에 든다는 것이 획기적인 착안점이라고 생각했다.
-인명은 그런 피조물에 대한 어두운 질문을 불교적 세계 속에서 녹여냈다. =사람의 시공간을 이승과 저승으로 나누어 삶을 계속적으로 영위해 나가는 연기설과 윤회사상이 현대사회의 기계문명 논리와 가장 선명하게 대립지점을 세울 수 있지 않겠나. 역사적으로 구축된 서구화된 사상이나 이성적이고 설명 가능한 세계, 그리고 물질적 세계의 감각에 대한 반대로서 불교가 가지는 충돌의 드라마를 그리고 싶었다. 정신과 물질의 화해, 창조주와 피조물의 갈등, 그리고 로봇과 인간 사이의 경계에 대한 굉장히 심각하고 아이러니한 문제제기인데 그걸 삶의 어리석음,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블랙코미디로 풀어보고 싶었다.
-사원의 프로덕션 디자인 컨셉이 궁금하다. =당시 인류멸망의 징후로서 많이 다뤄지던 이슈가 지구 온난화여서 그걸 레퍼런스로 해 사찰 내부를 조금 큰 사각형 형태의 통풍과 온도 조절이 가능한 구조로 만들었다. 승복 디자인은 티베트 라마교에서 힌트를 얻어 제작했다.
-작품의 정서적 열쇠라고 할 수 있는 인명의 디자인은 어디서 출발했나. =사람처럼 얼굴이 있고 팔다리가 있다고 할 때 메커닉의 한계는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크리스 커닝엄이 만든 비욕의 뮤직비디오 <All is Full of Love>에 등장하는 안드로이드나 알렉스 프로야스의 <아이, 로봇>에 등장하는 로봇 디자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얼굴은 부처의 얼굴에서 따온 건데 어떤 때는 근엄하고 무섭게 보이고 또 어떤 때는 자비롭게 보인다. 쇠붙이에도 감정을 담고 싶었달까. 인간사의 제 감정을 반영하는 얼굴로 하고 싶었다. 물론 입도 움직이게 하고 이것저것 더 하고 싶었다. 그런데 로봇제작 전문업체에 가보니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만들려면 5억원은 줘야 한다더라. 예산상 그건 불가능했고 특수분장팀 ‘셀’이 며칠 뒤 몸통과 다리 위주로 뭔가를 만들어왔더라. 적당히 움직이기도 하고. 어, 괜찮네, 그랬는데 또 며칠 뒤에는 머리가 달려 있고 고개도 돌아가더라. 볼 때마다 달라지던데 1억∼1억5천만원이면 되겠다고 했다. 진작에 이렇게 할걸, 하는 후회가 들면서(웃음) 그렇게 현재의 인명이 탄생했다. ‘셀’은 정말 천재들이라고 생각했다.
-인명은 원래 절의 안내로봇이었지만 부처로 추앙받게 된다. 그것은 결국 인간과 로봇의 경계와 무관하게 가진 것 없고 수양도 없는 필부가 문득 깨달음을 얻는다는 반엘리트주의나 반선민의식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그런 식으로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큰스님이 얘기하는 것처럼 엄청난 인내와 고통이 수반된 수행을 통해 경지에 이르는 것인데 인명은 단순히 공장에서 만들어진 상태일 뿐인데 그런 경지에 가닿게 된다. 종교적 수행마저 부정하는 모순에 빠지는 거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수행과 참선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영화가 특정 종파에 근거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인간이 내면에 본래부터 부처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으면서 수행을 통해 자기 내면에 있는 본래의 부처를 발견해 성불하는 것을 가장 큰 목적으로 삼는 선(禪)불교의 영향이 짙은 게 아닌가 싶다.
-지금 작업 중인 <라스트 스탠드>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궁금해한다. 워낙 조용히 떠나서. (웃음) =퇴물 보안관의 마지막 싸움 같은 컨셉이다.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실제로 온몸을 다 수술해서 고장 안 난 곳이 없었다. 빠르게 해야 할 때 느리게 하면 너무 답답한데, 여기서 <고릴라>를 봤는데 사실 옛날 영화 봐도 그때도 느렸더라. (웃음) 그런 게 이번 영화의 컨셉과 잘 맞아떨어져서 그만의 액션영화가 나올 것 같다. 내가 할리우드로 떠나며 기대하고 설던 것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로케이션이다. 우리가 지금껏 즐기고 상상해온 영화적 공간이 대부분 미국 아닌가. 두 번째는 장르영화의 원천이 할리우드이기에, 원하는 소재와 장르를 마음껏 해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막연하게 그려온 할리우드 배우와 스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그런 점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 포레스트 휘태커와의 작업은 커뮤니케이션도 좋았고 기대 이상이었다.
-힘든 순간들도 분명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영화는 언제쯤 볼 수 있나. =할리우드에서 영화 만드는 게 평생의 꿈도 아니었는데… 힘들 때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기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도 했다. (웃음) 잘 안 풀리는 날은 1시간에 한번씩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바꿔 말하면 처음부터 영화를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신인의 기분이 들어서 영화에 대한 새로운 환기가 됐다. 사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거쳐 <악마를 보았다>를 끝내기까지 스스로 프레시한 지점들이 결여돼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나를 더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아보자 하는 생각에 할리우드로 간 이유도 있으니까. 종종 왜 나를 해고 안 하나, 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내 작품이 스스로 궁금하다. 영화는 내년 1월18일에 개봉한다. 라이온스 게이트에서 선점하고 들어갔다. 그날 붙는 영화로 현재 확정된 건 마크 월버그, 러셀 크로가 출연한 앨런 휴스의 <브로큰 시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