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기획하고 해설을 쓴 세계문학단편선집 시리즈 <바벨의 도서관>이 전 29권으로 완간되었다. 보르헤스의 걸작 <픽션들>에 수록된 유명한 단편 제목과 같은 이름의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백발의 보르헤스가 실명의 암흑에서 회상해낸 문학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 가장 가까이 맞닿은 서사모음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는 물론 고딕소설의 기원인 벡포드, 환상소설의 선구자인 카조트, SF소설의 효시로 꼽히는 힌튼을 비롯한 작가 40여명이 시리즈에 이름을 올렸다.
작품 선정 기준은 주관적이고 편향적이며, 그래서 다른 세계문학전집과는 색깔이 확연히 다르다. 마치 보르헤스의 사적인 도서관에 자리를 허락받는 듯한 경험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유년기의 경험으로 인도받고 앞이 보이지 않는 그의 머릿속 문학 지도를 함께 더듬는 것 같은 재미를 준다.
이 시리즈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보르헤스의 작품 해설만을 모은 <바벨의 도서관-작품 해제집>도 별도로 출간되었다. 2800원이라는 착하다 못해 미안한 가격의 작품 해제집에는 29권 164편의 소설을 쓴 작가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책에 대한 개요, 그리고 보르헤스의 해설이 실렸다. “카프카의 가장 분명한 장점은 허용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솜씨이다. 몇행만으로 그는 영원히 남을 상처를 새겨넣는다.” “수줍음을 탔던 사키는 단편들을 평범한 어조로 서술했으나 그 내적 줄거리는 쓰고 잔인하다.” “슬픈 운명과 모험적인 정신을 가진 이 위대한 아일랜드인(오스카 와일드)은 우리와 동시대인이며, 미래의 많은 세대들의 동시대인이 될 것이다.” “문학은 행복의 형태들 중 하나이다. 아마 체스터턴만큼 내게 행복한 시간을 많이 안겨준 작가는 없을 것이다.” 보르헤스의 글이 궁금해 해제집만 읽겠다고 작정해도 결국 보르헤스의 글에 넘어가 바벨의 도서관 문을 열어젖히게 될 것이다. 씁쓸한 마음으로 인정하자면, 좋아하는 작품에 대한 애정어린 글만큼 상업성이 뛰어난 언어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