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국어판 서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로사회>의 첫 문장은 이렇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항생제의 발명으로 바이러스적이었던 한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면 21세기의 시작은 신경증적이었다.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 한병철은 이런 질병이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것임을 지적한다. 타자성은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변질되며, 여행하는 관광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피로사회>를 읽을 때 가능한 한 많은 단어들의 뜻을 저자가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노와 짜증이라는 단어를 예민하게 구별해야 하고, 저자가 쓰는 방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한병철은 그 두 가지를 이렇게 나누었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피로’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우리가 처한 난관을 상징하지만 궁극의 탈출구를 뜻하게 된다. 아는 단어라 해도 처음 보는 단어처럼 다시 읽고 새롭게 정의하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이 책이 묘파하려는 우리의 삶과 가능한 대안을 파악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이 책이 제기하는 자기 착취 문제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때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긍정과잉의 시대가 낳은 괴물이 바로 나 자신일 수 있다는 깨달음도.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중략)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한병철은 ‘피로’라는 단어를 제시한다(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단어의 뜻을 고집하지 말고 이 책에서 필자가 특정 단어를 어떤 맥락에 두는지 눈여겨보라). 그는 근본적 피로를 영감을 주는 어떤 것으로, 나아가 특별한 태평함, 태평한 무위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제목만 읽고 그 뜻을 상투적으로 미루어 짐작한 사람에게는 일종의 반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