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30년 넘게 배우로 영화계에 몸담아왔지만 단역이나 엑스트라를 벗어나지 못한 할머니 배우가 있다. 바로 필리핀의 릴리아 쿤타파이다. 주로 저예산 공포영화에 귀신이나 마녀 역으로 출연하였고, 당연히 대중적 인지도는 낮다. 필리핀 대중은 그녀의 이름을 거의 모르며, 공포영화에서 흰머리를 풀어헤친 그녀의 스틸 사진을 보여주면 그제야 겨우 알아보는 정도이다. 그런 그녀가 <교차로>(Sangandaan)에서 조연을 맡아 필리핀의 권위있는 영화상인 16회 AFTAP상 여우조연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일생에 다시 오지 못할 기회를 잡은 그녀는 기대감에 부풀어 동네 드레스 대여점에서 드레스도 준비하고 수상 소감 연설까지 준비하여 시상식에 참여하였다. 비록 자가용이 없어 택시를 타고 가 시상식장의 레드카펫을 밟았지만 상만 탄다면 그까짓 게 뭐 대수랴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수상하지 못했고, 당연히 수상 소감을 적은 쪽지도 휴짓조각이 되어버렸다. 여성감독 안트와네트 자다오네는 이도 다 빠져버린 이 이름없는 할머니 배우가 AFTAP상 여우조연상 후보로 지명된 시점부터 카메라에 담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릴리아 쿤타파이의 6단계 법칙>(Six Degrees of Separation from Lilia Cuntapay)이다. 모큐멘터리 형식의 이 작품은 쿤타파이와 함께 작업했던 영화인들의 인터뷰와 그녀의 일상을 담고 있다(그리고 시상식장 세트를 만들어서 쿤타파이로 하여금 미처 하지 못했던 수상 소감을 하게 한다).
쿤타파이에게 영화 출연은 무슨 거창한 직업이 아니다. 영화 촬영현장에서 많은 사람과 만나고 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즐거울 뿐이다. 물론 자신이 무명배우라는 사실에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출연한 작품의 포스터를 모아두지만 때로는 따로 그려서 벽에 걸어두기도 한다(자신의 이름을 제일 크게 쓴 포스터). 생활도 당연히 어렵다. 안트와네트 자다오네 감독이 쿤타파이에게 자신이 출연한 작품을 극장에 가서 보느냐고 물어보자,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아니, 줄거리도 다 알고 있고, 또 요즘 극장 티켓값이 비싸서 안 가.”
하지만 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필리핀의 거의 모든 감독, 배우들과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관계의 친밀도를 떠나 그녀는 필리핀 영화계에서 가장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릴리아 쿤타파이의 6단계 법칙>이라는 제목도 ‘케빈 베이컨의 6단계 법칙’(미국의 어떤 배우라도 출연작을 고리로 추적하면 케빈 베이컨과 6단계 안에 다 연결된다는 법칙)에서 따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트와네트 자다오네는 쿤타파이의 인맥도를 그리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보인다.
AFTAP상 시상식에서 릴리아는 끝내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지 못했고, 수상자인 리오 록신이 쿤타파이와 상을 함께 수상하고 싶다며 그녀를 무대 위로 올린다. 쿤타파이는 눈물을 보이며, “나는 릴리아 쿤타파이입니다”라는 인사말을 한다. 영화 <릴리아 쿤타파이의 6단계 법칙>은 여기서 끝이다. 그런데, 잠깐. 진짜 드라마는 이후에 펼쳐진다. <릴리아 쿤파파이의 6단계 법칙>은 지난해 11월 필리핀에서 열린 제7회 시네마원 오리지널 디지털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초청을 받았고, 릴리아 쿤타파이는 이 작품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진짜로 자신의 수상 소감을 말했다. 그녀의 진짜 수상 소감은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유튜브에서 “Lilia Cuntapay Acceptance Speech”를 치면 확인 가능). 시상식장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이렇게 해서 무명의 할머니 배우의 간절한 소망은 현실에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이 할머니 배우, 너무나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