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없애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건 얼마나 처연한 일인가. 반대로, 누군가가 마음만 먹으면 나를 없애고 내 행세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영화 <화차> 속의 세상은 그런 일들을 부추기는 무서운 곳이다. 멀쩡하게 살고 있던 사람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도 잘만 돌아가는 비정한 곳이다.
나는 울적함과 공포심을 달래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리 호락호락 사라질 수는 없다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에 이런 의문을 가져보았다. 누군가가 어느 날 내 이름, 주민번호, 사는 곳 등 나의 신분을 도용하여 내 행세를 하며 살아간다. 한발 더 나아가 ‘굳이’ 성형까지 받아 나와 똑같은 외모까지 갖춘다(모르긴 해도 돈 좀 들 거야. 웅장한 턱선과 골격 만들기가 어디 쉽나). 하지만 나의 스타일은 어디까지 흉내낼 수 있을까? 제아무리 철두철미하게 나를 조사한다고 하더라도 민무늬 양말보다는 줄무늬 양말을 좋아하는 사소한 취향까지 흉내낼 수가 있을까? 아니,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불쑥 발현될 자신의 스타일을 철저하게 외면할 수 있을까.
개성 상실의 시대라지만 나는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이 세상에는 같은 스타일을 한 사람이 한명도 없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우리는 먹고살기 바빠서 나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건 엄두도 못 낸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 스카프 한장을 살 때도 우리는 반드시 생각한다. 이건 내 스타일인가? 때론 친구와 쇼핑을 하다가 서로의 안목에 깜짝깜짝 놀란다. 세상에, 저렇게 촌스러운 옷을 사 입을 수가. 그렇다면 이 친구가 그동안 바빠서 그냥 입고 다니는 줄 알았던 옷들이 사실은 엄선된 것이었나? 마음에 꼭 드는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발견하고 계산대 앞에 서면 내가 가진 대부분의 옷들이 비슷한 스타일이라는 걸 깨달을 때도 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어찌할 수 없는 스타일을 이미 갖게 된 것이다. 선영(김민희)도, 경선도, 이름이나 주민번호보다 더 확실한, 그 누군가가 없애거나 흉내내지 못할 자신만의 스타일은 어쩔 수 없었으리라.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배어 있어서 결국은 그렇게 할 수밖에는 없는 것. 그러니 한번 고민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지만 사실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 그것이 바로 정체성, 곧 스타일이 아닐까.
그건 그렇고, 올여름에는 김민희가 용산역 에스컬레이터 신에서 입었던 분홍색 스트라이프 원피스를 입어보겠다고 하니 모두가 뜯어말리는 것은 어찌 된 셈일까? 분명 나는 오랜 세월 내 스타일을 연구해왔고, 그런 내가 예쁘게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는데도…. 왠지 그 원피스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면 어디선가 정체 모를 약혼녀를 향한 문호(이선균)의 절박한 외침이 들려올 것 같다. “너 누구야!!” “너로 살아. 제발 붙잡히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