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역시 누군가 24세 넘은 아줌마나 아저씨가 필요해.” 몇번을 읽었는지 셀 수 없지만 읽을 때마다 다른 대목에서 웃게 되는 강경옥의 <17세의 나레이션>인데 이번에는 방학 때 함께 놀러가기로 한 고등학생들의 대화에서 빵 터졌다. 생각해보면 나는 17살 때, 35살까지 살고 나면 모든 게 너무 다 정해져버려서 인생이 지겨워질 거라고 생각했고 그쯤에는 죽는 게 좋겠다고 결론냈었다. 선생님들이(생각해보면 당시 신생학교 선생이었던 그들 태반이 지금의 나보다 어렸다) 우리를 아련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너희는 아무것도 안 해도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할 때 코웃음쳤고 “공부만 하면 된다는 게 얼마나 좋은 줄 아냐”는 훈계를 끔찍하게 경멸했었다. <17세의 나레이션>의 주인공 세영이는 상담에 응해준 대학생 오빠에게 털어놓는다. “17살도 세상은 살기 힘들어요.”
처음 읽었을 때는 그저 애틋한 연애물이었지만 <17세의 나레이션>은 국산 청소년 소설이 부재하던 시절 한국에서 둘도 없이 귀한 성장만화였다. 크게 분류하면 순정만화 작가였던 강경옥은 <라비헴폴리스> <별빛 속에> <두 사람이다> 같은 대표작들이 SF니 호러니 하는 장르에 걸쳐 있었던지라 이례적으로 남자들도 꽤 좋아했었다. 그중 <17세의 나레이션>은 가장 현실적인 학원물이었다. 세영은 17살이다. 평범한 소녀다. 소꿉친구인 사내아이 현우와 그저 친구 사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우가 탤런트인 혜미를 좋아하게 되자 세영은 자신의 마음이 단순한 우정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이미 손을 내밀기에 너무 늦어버린 관계는 그렇다치고 혜미가 학교 연극반 주인공이 되었다가 TV 일 때문에 연극을 못하게 되면서 진짜 문제가 터진다. 대본을 외우고 있는 세영이 그 자리를 대신하자는 응급처방이 내려지지만 어찌저찌 결국 혜미가 다시 주인공이 되면서 세영은 이리저리 치이는 자신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우도 혜미도 다 착해빠져서 세영은 그 둘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역할’을 맡게 되어버린다. 평범하게 사는 건 힘들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드라마에서 “유정아, 큰일났어. 교무실에 가봐!”라는 대사 한마디를 위해 존재하는 역할. 그나마도 발버둥을 쳐야 유지하는 눈에 띄지 않는 비중.
그렇게 시간이 간다. 꽃이 아닌 꽃받침으로. 바람이 불면 때로 마음이 시끄러워지지만 밥벌이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자족하는 사이에 시간이 흐른다. 이해하지 못했던 결정, 받아들일 수 없었던 타인의 행복, <어린왕자>, 첫 번째 화장, 뉴 키즈 온 더 블록과 이상우의 <슬픈 그림 같은 사랑>, 몰래 가지고 나온 선글라스를 끼고 지하철에 뛰어들어 “나는 람보다! 두두두두!”를 외치고 얼른 도망가던 여름. 이제 그때 그 꽃도 지고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