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코시즈의 <휴고>, 그의 필모그래피만 놓고 본다면 너무나 이질적인 영화다. 하지만 그의 바이오그래피를 조금만 아는 이들이라면 <휴고>가 가장 마틴 스코시즈다운 영화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약먹는 마티’(Marty Pills)로 불릴 만큼 병약했던 어린 시절, 스코시즈는 골방에 처박혀 이탈리아계 사람들로 북적이는 비열한 거리를 창문 너머로 바라보거나, 부모와 함께 극장을 들락거리는 것을 낙으로 삼아야 했다(그의 성장담은 <마틴 스코시즈: 영화로서의 삶>을 보라). 실제로 <휴고>에서 가장 서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장면들은 시계탑에서 휴고가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들이다. 늘 북적이는 기차역에서 살아가지만, 휴고는 그 세상과 섞이지 못한다(상황은 다른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그가 창 바깥으로 뛰쳐나갈 수 있었던 동력은 바로 영화-기계(또는 그것의 상징인 자동인형)의 힘이다. 휴고와 유사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스코시즈는 자신이 영화로부터 받았던 위로를 죽어가는 영화에 고스란히 되돌려주려 한다. <휴고>는 멜리에스와 초기 영화에 대한 예찬이자 기계(카메라)의 힘을 빌려 인간(의 꿈)이 어떻게 더 완전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려는 영화다. 스코시즈가 사멸의 위험에 노출된 영화를 보존하자며 ‘세계영화재단’을 설립했듯, <휴고>는 ‘그와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서 잊혀진 채 죽어가는 영화들에 생명(anima)을 되돌려주려 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범람과 함께 극영화가 찍는 영화에서 그리는 애니메이션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다면, 스코시즈는 그 힘을 빌려 죽어 있는 것들을 깨우는 영화, 즉 ‘말 그대로’ 애니메이션(animation-생명 불어넣기)으로서의 (실사) 영화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휴고>다.
멜리에스의 영화를 위해 존재하다
‘영화 중반부까지만 한정한다면’ <휴고>는 무척 실망스러운 영화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파리의 전경에서 기차역까지 이어지는 오프닝 시퀀스 장면과 휴고(에이사 버터필드)의 달음박질을 따라가며 시계탑 내부의 거대한 기계장치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몇몇 장면을 제외한다면, 조르주 멜리에스(벤 킹슬리)의 정체가 밝혀지는 시점 전까지는 <휴고>를 3D영화로 연출한 마땅한 이유가 없어 보이기조차 한다. 만약 <아바타>와 같은 영화를 기대하고 <휴고>를 선택했다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한참을 ‘평면적인’ 3D영화의 길을 가던 <휴고>가 본격적으로 3D영화의 매력을 발산하는 시점은 휴고와 이자벨(크로 모레츠)이 서랍장에서 발견한 멜리에스의 영화 속 장면(그림)들이 허공을 날아다니며 ‘무빙 픽처스’(moving pictures)의 마술적 매혹을 발산하는 장면부터다. 실제로 봉인된 이야기가 풀리는 듯한 이 순간 이후, 휴고와 이자벨이 영화박물관으로 향하면서 초기영화에 대한 스코시즈의 헌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이처럼 <휴고>에서 조르주 멜리에스(그리고 초기영화)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시점과 3D영화 특유의 스펙터클이 펼쳐지는 시점이 겹치는 까닭은, 무엇보다 스코시즈가 이 영화의 ‘쓰임’이 무엇인지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스코시즈가 원하는 것은 현재의 관객이 만끽하는 경이로운 스펙터클과 그 기원 사이에 끊어진 끈을 다시 잇는 일이다. 멜리에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죽었던 것이 깨어나는 것’과 같다. 스코시즈가 보기에, 현재의 관객이 경험하는 영화의 스펙터클 대부분은 이미 멜리에스 영화에 내재했던 것들이고, 때문에 관객이 <휴고>를 통해 경험해야 하는 것은 <휴고> 자체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바로 멜리에스 영화(그리고 초기영화) 의 경이로움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스코시즈가 3D영화로 <휴고>를 완성해야 했던 이유 중 하나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해저 2만리>를 촬영하고 있는 멜리에스의 스튜디오를 3D로 재연한 장면이다. 스코시즈가 이 장면에서 원하는 것은 멜리에스 눈속임 영화(trick movie)를 3D로 단지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내재하던 3D영화의 속성을 끄집어내 관객에게 경험하게 하는 일이다. 앙드레 바쟁은 영화는 ‘관념’적인 현상이며, 사람들이 영화에 갖는 관념은 영화 기술이 그것을 실현하기 전에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 확고하게 존재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실현되지 않았던 것은 관념에 대한 물질의 강인한 저항 때문이었다. 시네마토그래프를 제작했던 뤼미에르는 영화에 미래가 없다고 말했고, 그들이 포기한 그 지점에서 멜리에스는 완전한 형태의 영화의 미래를 보았다. 달리 말해 그것이 비록 불완전한 형태라 해도, 멜리에스는 (미래의 시간에 성취될) 영화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스코시즈는 멜리에스가 그렇게 물질의 저항 속에 관념으로만 품어야 했던 미래의 영화 자리에서 그의 영화를 되살려낸다. 그러니까 스코시즈는 자신이 보여준 경이로운 스펙터클 모두를 ‘기꺼이’ 멜리에스의 소유로 되돌려준다. <휴고>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순전히 스코시즈의 이러한 영화적 태도 덕분이다.
창조가 아닌 복원의 영화
<휴고>가 반복적으로 시계탑 내부의 기계 장치를 보여주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겉으로 드러난 세계가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정작 우리 눈에서 감춰진 세계, 그것이 스코시즈가 <휴고>에서 보여주려는 세계다. 휴고의 말처럼, 사람들은 시계가 고장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움직이려면 그 뒤편에 누군가가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간다. 어쩌면 우리가 초기영화를 잊은 것은, 째깍째깍 끊임없이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시계처럼 우리의 눈앞에 지속적으로 현재의 영화들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애초에 영화는 시간을 보존하는 예술,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사멸시키는 시간에 저항하는 예술 형식이다. 하지만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던 조르주 멜리에스의 처지가 적절히 암시하듯, 그 대결은 시간의 승리로 끝났을 뻔했다. 타바드 교수(마이클 스터버그)가 시간은 오래된 영화에 대해서는 가혹하다, 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단지 화학물질로서 필름의 생명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스코시즈가 시간의 위협에 직면한 영화의 보존을 위해 세계영화재단을 설립했듯, <휴고>는 죽음으로 자신이 승자임을 선언하는 시간에 맞서기 위해서는 단지 필름을 보존하는 것 이상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영화를 잇는 것, 달리 말해 비록 과거의 영화적 시도가 불완전하거나 관념으로만 잠재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영화의 가능성을 찾아 살려내는 것, 달리 말해 과거의 (좌절된) 꿈을 통해 미래를 열어가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휴고는 자동인형의 창조가 아닌 부서지고 고장난 것을 ‘복원’하려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휴고>에서 맥거핀으로 기능하는 자동인형에 대해 영화는 끊임없이 무언가 설명하지만, 그 정체에는 여전히 수수께끼가 남아 있다. 스코시즈는 그 비밀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려줄 의사가 없는 듯하다. 아니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맥거핀이 자신의 정체(의미)를 비밀스럽게 감춤으로써 내러티브의 전진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스코시즈에게 영화는 여전히 비밀스러운 매력으로 남아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매력에 빠져, 또는 그 비밀을 밝히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 맥거핀의 매력, 그것은 영화의 비밀스러운 매력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스코시즈에게 초기영화는 여전히 영화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그렇기에 영화가 지속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는 궁극적인 동력인 셈이다.
2012년의 어트랙션 시네마
영화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기차와 시계를 본다. 영화가 ‘운동’과 ‘시간’의 예술로서 탄생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설정이긴 하지만, <휴고>는 그에 대해 깊게 파고들 의사는 없는 듯하다. 다만, 주성철이 적절히 지적했듯이(<씨네21> 843호)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기차의 도착은 뤼미에르의 첫 영화 <기차의 도착>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기차의 도착 이후, 스코시즈는 시계탑 안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소년의 눈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담아낸다. 우리는 스코시즈가 자신의 영화에서 주인공과 그가 강박적으로 집착할 세계와의 만남, 그 ‘운명이 각인되는 순간’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의 인물의 눈으로 표현하곤 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이러한 숏 대부분은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한다). 그 만남의 순간, 주인공의 눈은 일종의 카메라가 되어 운명을 기록하고, 이후 영화는 그렇게 각인된 운명의 세계를 눈-영사기를 통해 펼쳐낸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휴고>에서 스코시즈에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관객이 배우의 얼굴을 보다 가까이서 조우하는 일이다. 3D영화의 스펙터클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휴고>는 실망스러운 영화에 가까울 텐데, 왜냐하면 <휴고>는 행위보다는 인물 중심의 영화이고, 무엇보다 얼굴과 마주하게 하는 방식으로 3D 화면의 효과를 활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휴고>에서 3D 기술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영화 엔딩 무렵 ‘줌인 트랙아웃’(zoom in track out) 기법을 통해 멜리에스를 관객의 눈 바로 앞까지 끌고 오는 환영의 순간이다. 이 얼굴의 등장은 강박의 세계에 사로잡힌 스코시즈 세계의 전형적 인물의 얼굴표정을 3D 화면으로 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킬 만큼 매혹적이다.
<휴고>가 인물 중심의 영화라 해도, 3D 특유의 스펙터클을 기대하는 관객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텐데, 스코시즈는 이를 아주 흥미로운 방식으로 해결한다. <휴고>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는 뤼미에르의 <기차의 도착>이 상영되던 그랑 카페의 일화를 소개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스코시즈는 최신 3D영화 기법과 초기영화를 잇는 것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코시즈는 <기차의 도착>을 그대로 보여주다가 카메라를 뒤로 이동시켜 기차가 도착하는 영화 속 장면과 그것을 관람하는 관객의 반응을 동시에 담아낸다. 그런데 도착하는 기차에 깜짝 놀라며 모두 몸을 웅크리는 관객의 모습은 현재의 3D영화가 관객에게 원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 장면 이전에 극장에 숨어든 휴고와 이자벨이 고층 빌딩의 시계에 매달린 해럴드 로이드의 모습(<마침내 안전!>)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장면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해럴드 로이드의 액션 하나하나에 놀라는 이자벨의 표정이 그 시대의 관객성이다. 영화사가인 톰 거닝이 지적하듯이, 관객이 초기 영화에서 느꼈던 매력은 스토리(또는 서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초기영화는 어디까지나 스펙터클 자체의 매력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어트랙션 시네마’(cinema of attraction, 견인의 영화)로 존재했다. 물론 거닝은 어트랙션 시네마를 1907년까지의 영화로 상정하지만, 그것은 그 이후 버스터 키튼과 해럴드 로이드 등을 거쳐 블록버스터영화까지 지속되고 있는 영화 특유의 속성이고, 그 대표적인 계승자가 바로 3D영화다.
스코시즈는 초기영화에 대한 관객 반응과 3D영화의 관객성을 동일한 지점에 위치시키려 한다. <휴고>에서 3D 특유의 스펙터클한 광경이 펼쳐지는 장면들은 기차와 시계가 연관되어 있다. 뤼미에르 시대의 관객이 기차가 화면 바깥으로 튀어나올 듯한 착각에 몸을 웅크렸듯이, 휴고의 꿈장면에서 기차가 화면 바깥으로 튀어나올 듯한 환영에 지금의 관객 역시 움찔 놀란다. 마찬가지로 휴고가 시계에 매달리며 곡예를 부릴 때, 앞서 보았던 이자벨의 반응은 현재의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이된다. 스코시즈는 먼저 초기영화 시대의 관객 반응을 보여준 뒤 동일한 것의 반복을 현재의 관객으로부터 이끌어낸다. 즉, 이미지에 대한 민감함으로 현재의 관객 반응을 미리 선취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초기영화에 대한 헌사는 관객의 체험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스코시즈가 3D영화를 완성해야 했던 또 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환영의 효과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러한 체험의 반복으로 인해 2012년의 극장이 1898년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스코시즈는 과거를 현재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영화와 관객)를 과거화하는 방식으로 <휴고>를 완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