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플레이어가 우리집에 들어온 건 1990년대 초반이다. 이것이 개발된 건 1982년이지만 한국에서는 당시 거의 보급되지 않은 상태였으니 ‘나름 얼리어답터’였던 아버지 덕에 첨단 문물을 익히게 된 셈이다. 처음 CD로 음악을 들었을 때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LP판 특유의 지글거림이 없는 데다 사운드가 정말로 투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이 역사적 변화를 모든 사람이 반긴 것은 아니다. 아날로그의 부드럽고 깊은 음이 들리지 않는다거나, 디지털 사운드가 귀를 아리게 한다거나, 심지어 LP의 스크래치에서 나는 잡음이 없어 아쉽다는 불만도 있었다. CD 겉면에 발라진 페인트가 서서히 반대편을 잠식해 수명이 100년도 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도 들려왔다. 어쨌거나 불과 20년 남짓한 사이에 CD는 대중화됐다가 이제 디지털 음원에 밀려 차츰 자취를 감추고 있다. 마니아 사이에서 LP 바람이 다시 분다고는 하지만 그건 순전히 취미의 영역일 뿐이다.
DVD도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다. 한국에 비디오플레이어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88올림픽 무렵이다. 이때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한 비디오 대여시장은 90년대 중반 정점에 올랐다. 어쩌면 1995년 DVD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동네 언저리에는 비디오 대여점들이 여전히 성업 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음악에서 CD가 성공한 것처럼 DVD는 먹혀들었다. 그 중간에 나온 레이저 디스크가 AV마니아의 호사스런 수집 욕망을 충족시켰다면 DVD는 일반인이 접근하기에 큰 부담이 없는 매체였다. 한국의 경우 DVD 문화가 싹트기도 전에 디지털 소스에서 추출한 ‘파일’이 불법적으로 업로드, 다운로드되는 기형적인 과정을 겪었지만, 해외에서는 2000년대 중반까지도 DVD가 큰 흐름을 이뤘다.
CD, DVD 외에도 디지털카메라, HDTV 등 거스를 수 없는 디지털 혁명의 쓰나미가 이제 영화계까지 덮쳤다. 최근 코닥의 파산신청은 이러한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영화의 또 다른 이름으로 인식됐던 ‘film’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file’이 대체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이번 특집기사에 잘 드러나 있다. 전 <씨네21> 기자이자 미시간대학 필름아카이브 담당자인 오정연과 김성훈의 성실한 ‘원격 협업’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된 영화산업의 디지털화는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고 급격하다. 아직까지 생산, 유통, 보존에서 여러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사라지는 무언가에 대한 아련함도 품게 돼 이 변화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확실한 점은 이 흐름을 뒤집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젠 디지털 기술이 한계와 문제점을 스스로 극복해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유성영화, 컬러영화, 3D영화가 등장할 때 그랬듯, 기술이 어떻게 변하건 영화의 본질은 크게 바뀌지 않지 않던가.
P.S. 그런데 혹시 제 책장 위에 켜켜이 쌓인 VHS 테이프들 입양하실 분 안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