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없이 달리고만 싶었다.” 5년 전, 김수현 감독은 촬영현장이 아닌 길 위에 있었다. 시나리오 대신 오토바이 핸들을 쥐고 있었고, 방한모 대신 헬멧을 쓰고 있었다. 난생 처음하는 퀵서비스 일이었지만, “현장을 버리고 길 위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악몽을 바람에 떨쳐낼 수 있어 좋았다. 돌이켜보면 모든 게 다 그놈의 현장사고 때문이었다. <꽃잎>을 끝내고 난 뒤, “데뷔 전에 뭘 하나 해보고 싶어” 시작한 조그만 단편영화 한편이 문제였다. “길에서 사는 10대 아이들의 고단한 삶을 담고 싶어” 신탄진에서 촬영을 시작했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촬영은 중단됐고, 뒷수습을 지켜보면서 그는 “혹시 내가 책임지지 못할 일을 벌인 건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짓눌려야 했다.
하지만 쉽사리 치유될 것 같지 않던 그의 상처를 아물게 한 것도 ‘시간’이 아니라 ‘영화’였다. <나쁜 영화>에 조감독으로 합류하게 되고, 10대들과 어울리면서 점점 자신을 다독일 힘을 얻었다. 오토바이 타고, 레카차 타고 무작정 떠돌면서 만난 길 위의 사람들 이야기를 <귀여워>에 판각하면서 다시 해보자는 의욕도 얻었다. <귀여워>의 시나리오 초고만 하더라도 거칠고 황폐한 인물들을 쭉 보여주는 식이었지만, 도중에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순이라는 ‘촉매제’ 같은 인물을 넣은 것도 그런 심경의 변화와 무관치 않았다. 물론 오랜 시간 보듬고 다듬는 과정이 만만한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캐릭터 위주로 후닥닥 편하게 써내려갔는데, 주위 사람들이 이걸 두고 자꾸 해석하려 들었고 그걸 시나리오상에서 어떻게든 풀어주는 게 무척 힘들었다.”
가끔 “쉽게 내린 결정 때문에 사서 고생하는 것 같다”는 그를 맨 처음 유혹한 건 영등포 재개봉관에서 본 <레이더스>. 관람 내내 “저런 거 딱 한번만 해보고 싶다”는 소망뿐이었다. 한번의 가출과 아버지에게 얻어맞은 뺨 한대로 쉽사리 영화과 진학의 뜻을 이뤘고, 아는 형의 권유로 동국대 연극영화과 87학번이 됐다. 당시로선 영화연출을 지망하는 이가 거의 없어, 바깥으로 돌며 정지우, 김용균 등 다른 학교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러다 만난 구성주 감독 덕에 졸업할 무렵 데뷔하는 이가 없으면 자리가 잘 나지 않았다는 장선우 감독의 연출부가 됐다. <경마장 가는길>을 보면서 쾌재를 불렀다는 그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시작으로 “착취도 많이 당했지만, 한없이 열린 좋은 스승” 아래서 수학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첫 번째 카니발을 준비하고 있다. “단순한 카타르시스와 순간의 엑스터시를 넘어 영원한 카니발의 세계로 들어간” 에밀 쿠스투리차를 경쟁자로 삼고서. 글 이영진 anti@hani.co.kr·사진 오계옥
어떤 영화?
제작사 청년필름 출연 캐스팅 중 5월 크랭크인 예정
무너지기 직전의 오래된 아파트. 철거 직전의 상황이다. 물론 이곳은 신내림을 받았다는, 자칭 용한 점쟁이 한진희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한때 반듯한 외모와 그럴듯한 말솜씨로 여신도들을 몰고 다니며, 희대의 사기극을 벌인 전력이 있는 이 사이비 교주는 50살이 넘어서도 아이를 갖길 원하는 중년 부인에게 부적을 써주는 대신 관계를 갖는 식으로 자신의 신통함을 과시한다. 퀵서비스맨 963과 레카차를 모는 개코, 그의 배다른 두 아들 역시 내일 없는 하루를 연명하는 건 아비와 마찬가지. 그러던 어느날, 개코는 적적해뵈는 아비의 모습에 측은함을 느끼고 고속도로에서 뻥튀기를 파는 젊고 예쁜 처녀, 순이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순이의 등장으로 한진희, 963, 개코의 애정 3파전이 벌어지고, 여기에 출소한 지 얼마 안 된 또다른 아들 머시기가 순이를 향한 순정을 품게 되면서 철없는 부자간의 말릴 수 없는 싸움이 이어진다.▶ 2002 신인감독 14인 출사표
▶ [2002 신인감독 14인] 의 김현석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아유레디?>의 윤상호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데우스 마키나>의 이현하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김동원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귀여워>의 김수현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라이터를 켜라>의 장항준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명랑만화와 권법소년>(가제)의 조근식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정글쥬스>의 조민호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일단 뛰어!>의 조의석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서프라이즈> 김진성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오버 더 레인보우>의 안진우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연애소설>의 이한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로드무비>의 김인식 감독
▶ [2002 신인감독 14인] 의 이종혁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