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라면 모름지기 싸움을 잘하거나 밴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잠시 있었다. 중학생 시절 동네 남고 축제에 구경 갔던 날, 어스름 깔리던 무대에서 부활의 <사랑할수록>을 열창하던 밴드 보컬 오빠의 외모는 평범했지만 첫 소절이 울려퍼지던 순간의 떨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뒤로도 록의 ㄹ은 몰랐어도 밴드 하는 오빠들을 좋아한 적은 몇번 있었다. 한국, 미국, 일본, 국적은 종종 바뀌었지만 긴 갈기머리와 늘씬한 다리에 딱 붙는 청바지, 화려한 눈화장까지, 그들에겐 분명 뭔가 특별한 에너지가 있었다.
tvN <닥치고 꽃미남 밴드>의 고교생 밴드 ‘안구정화’의 공연을 찾아와 “오빠들 만질 수 있는 자리” 달라며 웃돈을 내미는 초등학생부터 이십대 누나들까지, 철없고 이성을 상실한 여성 팬에게 ‘닥치고 공감’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밴드의 구성이 돌아이 로커의 필이 충만한 이민기, KBS <화이트 크리스마스>에서 공감능력 부족한 천재로 출연했을 때부터 매력이 넘쳤던 성준, 눈빛만으로도 사연 있어 보이는 인피니트의 대표 미남 엘, Mnet <슈퍼스타 K3> 예선에 ‘횟집 총각’으로 등장한 순간 재빨리 눈도장 찍어뒀던 김민석, 테리우스 이후 단발이 가장 잘 어울리는 귀족적 미남이자 실제로 밴드 메이트의 드러머이기도 한 이현재, 체격 좋고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엄마들에게도 인기 만점일 것 같은 유민규라니. 이토록 제목에 충실한 캐스팅이 발표되던 순간부터 물개박수치며 방송을 기다렸다는 사실은 절대 비밀이다.
물론 KBS <꽃보다 남자>보다, MBC <커피프린스 1호점>보다 꽃미남이 더 많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이 드라마가 요즘 말하는 ‘인소’(인터넷 소설) 스타일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천재 기질이 있던 밴드 리더 병희(이민기)가 어이없는 사건사고로 죽은 뒤, 그의 ‘뮤즈’였던 수아(조보아)를 두고 병희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새 밴드 리더 지혁(성준)과 아버지는 굴지의 사업가에 누나는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운영하는 엘리트 승훈(정의철)이 대립하는 삼각관계는 뻔하고 달달한 러브라인으로 손발이 설탕에 절여져 쪼그라들 지경이다. 자신들에게 수표를 뿌리는 승훈에게 달려들던 ‘안구정화’ 멤버들이 승훈의 경호원들과 패싸움을 벌이거나, 친구들이 징계 위기에 처하자 승훈에게 무릎을 꿇는 지혁의 비장함도 약간은 실소를 자아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닥치고 꽃미남 밴드>는 자주 훈훈하고- 물론 안구는 항상 정화되고- 종종 가슴 찡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는 게 꿈인 동시에 “난 가장 행복한 순간에 죽고 싶어”라고 말하던 병희는 불안정한 폼생폼사의 청춘이지만, 친구의 영정이 추울까봐 패딩 재킷을 씌워주고 우는 대신 불꽃놀이로 애도하는 소년들의 일관된 허세는 단지 겉멋이 아니라 십대의 우리가 공유했던 감정들을 끄집어내게 만든다. 중요한 대회의 라이브 도중 다쳐서 피 흘리는 현수(엘)의 손가락을 보고 연주를 중단시키고 대형 기획사의 ‘일부만 영입’ 제안에 계약서를 갈가리 찢어버리는 지혁의 모습은 우승이나 성공이나 승리가 아니라 친구와 우정을 지키는 게 제일 ‘간지난다’고 외치는 이 드라마의 패기다. 그리고 <닥치고 꽃미남 밴드>가 보여주는 궁극의 우정 판타지는 부유층 자제들이 주로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안구정화’ 멤버들이 “멸종 위기의 돌고래들”이라 불리며 무시당하는 드라마보다도 훨씬 황폐한 현실 속에서 마음의 오아시스가 되어준다. 행복은 성적순이라 가르치고, “점수가 달라지면 마누라 얼굴이 달라진다” 따위를 급훈으로 삼으며, 학생에게도 인권이 있음을 제도화하자고 하면 ‘임신 및 동성애 옹호’라며 우겨대는 어른들이 만든 지옥에서 노스페이스 패딩 점퍼의 가격에 따라 친구들을 서열화하고 ‘왕따’와 ‘빵 셔틀’의 존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십대들이 오늘도 살아가고 혹은 죽어간다. 병희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꿈처럼, 이런 청춘이란 존재할 리 없는 판타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닥치고 꽃미남 밴드>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다. 따, 딱히 꽃미남 때문만은 아니다. 저, 정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