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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진의 미드 앤 더 피플] 가난해도 괜찮아
안현진(LA 통신원) 2012-03-02

<셰임리스>의 에미 로섬

“이건 블루칼라 계급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에게는 계급조차 없다.” <셰임리스>의 프로듀서이자 작가인 폴 애봇의 말이다. 동명의 영국 TV시리즈를 리메이크한 <쇼타임>의 <셰임리스>는 시카고 빈민가에 사는 노동계급 갤러거 가족에 대한 초상이다. 갤러거 가족은 모두 7명이다. 늘 술에 취해 있어서 가족은커녕 자신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아버지 프랭크(윌리엄 H. 메이시)와 6명의 아이들이다. 엄마의 존재는 처음부터 이 가족에게 없다. 죽은 고모의 집에 살며, 그 고모 앞으로 나오는 연금을 꼬박꼬박 챙겨 술집에서 탕진하고, 장애인 수당을 받아서는 또 술집에서 탕진하는 프랭크 덕분에 아이들은 생존과 독립을 가훈 삼아 자라났다.

어리다고 예외는 없다. 큰딸 피오나(에미 로섬)가 아침을 차리다가 식탁 위에 빈 그릇을 올리며 말한다. “전기세, 가스비가 오늘까지.” 동생들은 주섬주섬 쌈짓돈을 꺼내 그릇을 채우고, 이제 열두살인 넷째 데비는 다섯째 칼에게 “이제 너도 보탬이 되는 게 좋겠다”고 한마디 한다. 갤러거 가족의 가계는 이렇게 돌아간다. 제대로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피오나는 낮에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막내동생 리암을 돌보고, 밤에는 클럽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팁을 받는다. 수재인 둘째 립은 SAT(미국 수학능력평가시험) 예비고사를 대리로 봐주는 불법행위로 짭짤하게 돈을 벌고, 셋째 이안은 슈퍼마켓 점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직 어린 넷째 데비와 다섯째 칼은 이웃집 우편함을 뒤져 쿠폰을 찾아내거나, 문이 열린 트럭에서 음식을 빌려온다!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는 못해도, 비를 피할 지붕이 있고, 사지 멀쩡함에 감사하는 이 아이들은, 모두 다 괜찮다.

철없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빨리 성숙해져 도리어 부모를 보살피는 생존능력을 터득한다. <셰임리스>의 아이들이 그렇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기보다는 가난에 익숙해진 모습이다. 우울하거나 그늘진 얼굴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밝고 순수하지는 않다. 갤러거가의 아이들은 늘 가드를 올리고 있다. 더 가지려 욕심내지도 않는다. 아이들에게는 서로가 전부라, 그들을 떼어놓으려고 한다면, 설혹 그 사람이 엄마라고 할지라도, 물어뜯고 소리지를 준비가 되어 있다. 시즌1에서, 아이들에게는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부모를 둔 죄로, 뿔뿔이 흩어질 뻔한 위기가 몇번 닥쳐왔는데, 그때마다 피오나는 갖은 수단과 방법, 협박과 거짓말을 동원해 가족을 지켜냈다.

억척스럽지만 무덤덤하고 쿨한 맏딸 피오나는 <오페라의 유령> <포세이돈> 등의 시대극에서 화려하면서도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여배우 에미 로섬이 연기한다. 피오나는 노브라에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만 한장 걸친 때가 더 많고 대부분 민낯이지만, 로섬은 그 어떤 때보다도 반짝반짝 빛난다. 상대역 저스틴 채트윈(스티브 역)과의 지나치게 적나라해 마치 일상처럼 느껴지는 섹스신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새벽같이 스티브를 깨워 “애들 일어나기 전에 한번 더 할래?”라며 웃옷을 벗는 피오나는 화끈한 애인이지만, 스스로 짊어진 책임 같은 건 다 잊고 몰디브로 떠나자는 스티브의 달콤한 구애 앞에서, 동생들을 두고 떠날 수 없어 입술을 깨무는 연약한 누이다. “나는 피오나가 보여주는 이중성을 사랑한다. 강한 겉껍질 아래 한없이 유약한 속내가 숨어 있다.”

잊을 뻔했는데, <셰임리스>는 코미디다. 어이없게 웃기건, 배꼽 빠지게 웃기건, 달콤쌉쌀하건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코미디란 말이다. 아이들이 너무 예쁘고 기특해서 웃으면서도 눈물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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