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의 지역간 동반발전은 범세계적인 화두이다. 유럽의 경우 이미 오래전부터 유럽영화의 동반성장을 위한 다양한 기구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1997년에 설립된 EFP(European Film Promotion)의 경우 32개 국가의 31개 단체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으며, 유럽영화의 세계시장 진출, 유럽의 제작자, 연기자 발굴 및 교육 등의 활발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후원하는 유로피언커미 션미디어(European Commission MEDIA)는 유럽의 시청각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1991년부터 장기플랜을 운영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배급, 제작지원, 프로모션, 교육 등의 사업을 실시하고 있으며, MEDIA 2007(2007~2013)에는 총 7억5500만유로가 투입된다.
상대적으로 아시아는 이러한 공동사업이 거의 전무하다. 워낙 다양한 언어와 문화, 종교가 분포해 있고, 교류 자체도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 125다. 2005년 한국의 영화진흥위원회를 중심으로 일본의 유니재팬, 베트남미디어, 타이영화협회, 싱가포르 필름커미션, 말레이시아 멀티미디어 개발위원회 등이 모여 아시아필름인더스트리네트워크(AFIN)를 결성하여 아시아 영화산업의 공동성장을 추진한 바가 있다. 주로 주요 국제영화제에서 공동프로모션을 하는 등의 사업을 펼쳐왔지만 현재는 활동이 거의 중단된 상태이다. 때문에 지난 1월9일부터 13일까지 베트남과 미얀마에서 열린 ‘한-아세안 영화공동체 프로젝트’ 행사는 아시아영화의 동반성장을 위한 자그마하지만 새로운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외교통상부의 ‘한-아세안 협력사업’ 일환으로 열린 이번 행사는 아세안 국가 중 아직 필름커미션이 없는 지역의 커미션 설립을 지원하고 한국영화산업 발전의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산업 육성에 관심갖는 베트남, 개방의 문제 고심하는 미얀마
행사 주관은 부산영상위원회와 베트남 영화국, 미얀마 정보부 모션픽처엔터프라즈, 후원은 한-아세안 협력기금과 아시아영상위원회네트워크(AFCNet)가 맡았다. 이번 행사가 가능했던 것은 역시 부산영상위원회가 그동안 구축해놓은 네트워크 덕분이었다. 아시아 최초의 실질적인 필름커미션기구인 부산영상위원회는 지난 2003년 AFCNet를 결성하고 창립 때부터 현재까지 의장 도시를 맡고 있다. 현재, AFCNet에는 16개국 43개 필름커미션이 정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반면, 베트남과 미얀마에는 아직 필름커미션이 없다. 이번 행사를 베트남과 미얀마에서 가진 이유이기도 하다.
행사는 ‘필름커미션-이란 무엇인가?’, ‘베트남 영화사업의 특징 및 영화제작 환경’, ‘케이스 스터디: 영화를 통한 관광산업의 활성화’, ‘한국영화인 특별강연’ 등을 세미나의 주제로 다루었으며, 로케이션 팸투어, 한-아세안 영화인 간담회 등을 부대행사로 치렀다. 이번 행사에는 한국, now베트남, 미얀마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필리핀, 타이, 라오스, 말레이시아 등 여러 아세안 국가에서도 영화진흥기구, 필름커미션 관계자들이 발제자와 토론자로 참석하여 행사를 풍성하게 하였다. 이준익 감독의 제작 경험, 김태균 감독의 한국의 영화교육에 대한 특별강연도 많은 호응을 이끌어냈다.
베트남은 아직 연간 제작편수가 10편 내외로 영화산업 규모가 영세한 편이지만, 영화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하노이 근교의 콜로아 스튜디오의 확장사업이다. 1959년에 구공산권 국가들의 도움으로 설립된 콜로아 스튜디오는 그동안 열악한 시설 때문에 스튜디오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었다. 베트남 정부는 동남아시아 영화산업의 허브를 목표로 이 콜로아 스튜디오를 대대적으로 확장하기로 하였다. 2015년까지 2억달러를 들여 약 1만2천㎡ 규모의 종합촬영시설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사업의 시행권은 비나코라고 하는 한국 회사가 따냈다. 문제는 활용 방안. 베트남의 영세한 영화산업 규모로는 이 스튜디오의 수요를 채울 수 없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때문에, 베트남 정부는 이웃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영화촬영을 유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에는 많은 난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2013년에는 말레이시아에 총 10만㎡ 규모의 대지에 파인우드 스튜디오가 들어선다. 홍콩, 싱가포르의 스튜디오들과도 경쟁해야 한다. 때문에 당분간은 영화보다는 TV드라마 촬영에 활용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미얀마는 ‘개방’이 화두이다. 그동안 미얀마영화는 외부세계에 별로 소개된 바가 없다. 미얀마 영화정책을 총괄하는 모션픽처엔터프라이즈에 따르면 미얀마에서는 연간 15편 내외의 장편 극영화, 그리고 800편 내외의 비디오영화가 제작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작품은 거의 100% 국내에서만 소화되고 있다. 모션픽처엔터프라이즈의 응 미오 민트 국장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열린 부산영상위원회의 아시아영화정책포럼에 참석한 뒤, 가장 적극적인 개방론자가 되었다. 여기에는 미얀마의 변화하고 있는 정치 상황도 한몫하고 있다. 지난해 3월 초대 민간 대통령으로 선출된 테인 세인 대통령이 아웅산 수치 여사의 정치 활동을 허용하는 등 정치범을 석방하고, 반군과의 평화협상 등 민주화 조치에 나서면서 영화계도 개방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1월12일, 13일 이틀 동안 양곤에서 ‘한-아세안 영화공동체 프로젝트’ 행사가 열리기 직전, 1월1일부터 4일까지 양곤에서는 제1회 ‘자유예술영화제’가 열렸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 미얀마의 저명한 코미디언 자르가나르, 영화감독 민 틴 코코기 등과 함께 개최한 이 행사는 검열 당국의 승인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자유예술영화제’가 지난해 제작된 뤽 베송 연출, 양자경 주연의 <더 레이디>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아웅산 가문은 오래전부터 영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버마 독립운동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은 영국 식민지 시절, 저항운동을 하면서 정치영화에 출연한 배우이기도 하다. 당시 학생운동의 리더였던 코누 감독이 연출한 <보이콧>이 그 작품이다. 또한, 아웅산 장군은 국립영화제작사도 설립한 바 있다. 지난 2월13일에는 또 다른 의미있는 행사가 열렸다. 양곤의 다마사디에서 아웅산 장군 영화위원회(Bogyoke Aung San Film Executive Board Office)가 문을 연 것. 아웅산 수치 여사가 제작을 포함한 영화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업을 위해 만든 기구이다. 2월13일은 아웅산 장군의 탄생일이기도 하다. 이날 배우 키아우 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국립영화제작사의 사업허가증을 아웅산 수치 여사에게 기증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더 레이디>는 미얀마에서 개봉을 하지 못하고 있고, 많은 시민들이 불법 DVD를 찾아서 보고 있다고 전해진다.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도 행사 요청
이러한 변환기에 열린 ‘한-아세안 영화공동체 프로젝트’ 세미나에도 많은 미얀마 영화인과 미얀마 유일의 대학 영화 관련 학과인 국립문화예술대학교 영화와 드라마학과 학생들이 대거 참석하여 뜨거운 열기를 보여주었다. 이번 행사에 대한 참가자들의 만족도는 무척 높았다. 미얀마의 영화검열에 대한 이준익 감독의 민감한 발언에 대해서도 별다른 제재가 없었다. 개방에 대한 그들의 의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한편,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참가자들이 자국에서도 이러한 행사를 열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그들은 이러한 행사가 특히 영화 관련 부서의 관료들에게 좋은 자극과 공부가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필름커미션이 도시 차원의 기구이기 때문에, AFCNet를 통한 아시아의 네트워크 구축이나 동반성장의 기틀을 당장 획기적으로 확대해나가는 것은 어렵겠지만, 중요한 주춧돌을 놓는 과정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