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이소룡 워너비의 이야기. 시작은 어디선가 본 듯한 시끌벅적한 소년 성장담. 깡촌 동천읍에 사는 삼촌은 액션스타 이소룡을 동경해서 매일같이 무술을 연마한다. 건달이 삼촌에게 겁을 주려고 콜라병으로 배를 긁었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병원에 실려갔다는 식의 뻥튀기 일화들이 이어진다. 삼촌은 이소룡이 다 못 찍고 죽은 유작 <사망유희> 오디션을 꿈꾸지만, 희망은 어이없이 좌절되고, 그 빈자리에 삼청교육대가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소박한 외피를 후다닥 벗고 꿈틀거리는 생살을 드러낸다. 이야기 하나, 으악 소리 한번 내고 바로 죽는다는 뜻의 으악새 배우로 활동하며 왕가슴 미녀배우를 사랑하는 삼촌과 영화계. 이야기 둘,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 중산층으로 자리잡은 변호사와 직장인 조카 형제. 이야기 셋, 정치판과 손잡고 동천읍 조직폭력계를 장악한 조카의 친구 종태. 이 굵직한 세 이야기가 서로 꼬이면서 7080 한국 현대사의 줄기를 만든다.
수많은 이야기꾼 가운데 천명관이 특별한 건, 이야기 자체가 살아 숨쉬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거의 8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장대한 서사는, 이야기가 어디까지 자라날지 또 어떤 식으로 뻗어나갈지 궁금해서 계속 읽게 된다. 전작 <고래>보다는 훨씬 단정하고 현실적이다. 다 덮고 나서 기억에 남는 건, 으악새 배우 신세를 전전하는 삼촌 인생과 반듯하게 공부해서 취직하고 결혼한 조카들 인생이 보이는 대조. 공부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말처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으면 일단 잘 풀릴 가능성이 높은 분야. 반면 배우란, 하늘이 내려준 특별한 재능에 행운이 필요하고 리스크도 감당해야 한다. “그 특별함이란 저 높은 곳에서 스크루지처럼 인색한 누군가가 아주 가끔씩 무작위로 던져주는 선물.” 이 선물을 받지 못한 데다 고지식하고 착한 이소룡 워너비 삼촌은 진득하게 고생만 한다. 그래도 흥미진진하고 인상적인 인생을 살지 않았던가, 사랑의 완성보다도 더 값진. 다 읽고 나니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를 이렇게 고쳐 쓰고 싶다, “공부가 가장 재미없어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