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잊지 못하는 공연이 있다. 꿈에서 그리던 아티스트의 공연이어서 그럴 수도 있고, 공연을 함께 본 사람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 너무 힘든 공연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모두들 그렇게, 인생을 따라다니는 공연이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다. 나에게는 런던에서 본 시우르 로스(Sigur Ros)의 공연이 그랬다. 주변에 시우르 로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런던에서 시우르 로스 공연을 본 적이 있어요”라는 말을 하면, 모두 한결같은 반응을 보인다. 일단 “우와, 너무 좋았겠네요”라고 부러워한 뒤, “그래서 재미있었어요?”라고 궁금해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너무 좋긴 했는데, 재미있지는 않았다.
시우르 로스를 많이 좋아하지는 않았다. 자주 듣는 몇곡이 있긴 했지만 앨범 전체를 좋아한 적은 없었던 것 같고,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거나 우주를 배회하는 사운드 스케이프가 버겁게 느껴진 적이 많았다. 시우르 로스의 음악을 들을 때면 언제나 내가 한없이 작게 느껴지고 티끌로 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먼지로 변해서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런던에서 그들의 공연을 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곳이 한국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런던의 우중충한 날씨와 뼛속 깊이 파고드는 습기와 시우르 로스의 음악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런던에서라면, 나 따위 어디로 날아가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공연장은 넓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정확히 어느 정도 규모의 공연장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내 기억으로는 수천명이(수만명이었는지도) 꽉 들어차 있지 않았나 싶었다. 서 있기 힘들었고, 앉아 있을 자리도 없었다. 아, 시우르 로스가 이렇게 유명한 밴드였나. 나는 앞쪽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음악을 듣다가 수많은 사람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점점 뒤로 밀려났다. 멤버들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밀려나서 벽에 기댄 채 음악을 들었다. 조금 지나서는 공연장 로비로 나가 맥주를 마시며 시우르 로스의 음악을 들었다. 이대로 자꾸 밀려나서는 티끌이 되어 공연장 밖으로 날아가버릴지도 몰랐다. 런던의 공연장까지 와서 얼굴을 보지 않고 로비에서 라이브를 듣다니, CD로 음악을 듣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다시 힘을 내서 공연장으로 들어갔을 때 공연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공연장은 지구의 장소 같지 않았다. 커다란 공이 천장에서 떨어지더니 무대를 가득 메웠고, 수많은 공이 관객석으로 튀었다. 장관이었다. 진공 상태의 우주에서 시우르 로스의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음악이 공에 실려 허공을 떠다니는 것 같고, 공은 음악에 맞춰 튀어오르는 것 같았다. 공은 기포처럼 공간을 떠다녔다. 그 뒤로는 시우르 로스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 장면이 떠오른다.
브이제잉, 눈에 보이는 음악?
음악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음악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음표들이 허공에 떠다니고, 박자가 표시되고, 작곡자들이 그리고자 했던 이미지가 3D 입체 영상으로 나타나고, 선율이 그래프로 표시된다면 어땠을까. 그건 그 나름대로 재미있는 예술 장르가 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서 우리는 더 많이 상상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는 형상들을 떠올린다. 똑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모두 다른 형상을 떠올린다.
공연장에서 음악과 함께 영상을 보여주는 브이제잉(Vjing)은, 그런 의미에서 무모한 시도일 수 있다.- 브이제잉이 생소한 분들을 위해, 브이제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특공대’가 자동 연상되는 분들을 위해 잠깐 소개하자면, 뮤지션의 음악을 자신만의 영상으로 해석하여 뮤지션과 함께 공연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브이제이들이다.- 영상이 음악을 방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수만 가지 이미지의 음악을 단 한 가지 영상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2005년, 브이제잉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도무지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그때 본 브이제이 파펑크(parpunk)와 노브레인의 공연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신났다. 노브레인의 연주 뒤로 수많은 텍스트와 영상이 조명 역할을 했고, 이미지와 음표가 함께 춤을 추었다. 멋졌지만 어쩐지 어색했다. 영상이 뮤지션의 음악을 방해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너무 많은 정보를 준다는 기분이랄까. 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파펑크는 그 뒤로 뷰직(Viewsic)이라는 브이제이팀을 만들었고, 2012년에는 홍대 인디밴드들과 뷰직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공연 <프레드페리 서브컬처 뷰직 세션 2012>를 진행 중이다. 첫 번째 공연에서는 글렌체크가 상큼하고도 발랄하게 포문을 열었고, 두 번째 공연에서는 이승열과 카입(Kayip)이 공연을 펼쳤다. 이승열과 카입의 공연을 보면서 나는 시우르 로스를 다시 떠올렸다.
두 사람이 함께 공연을 펼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레짐작한 풍경이 있었다. 카입이 공연을 시작하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이승열이 자연스럽게 등장해 3집에 있는 곡들을 부른다. (카입은 이승열의 앨범을 프로듀싱했고, 이승열은 카입의 곡에 피처링했다. 2011년에 발표된 두 사람의 앨범 모두 최고다!) 이승열의 노래로 공연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파펑크의 영상이 관객을 압도한다. 사람들은 이승열의 노래와 목소리에 감탄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이것 말고 더 좋은 시나리오가 있겠어? 없지? 간편한 예측이었다. 공연은 예상에서 많이 빗나갔고, 한번 빗나가기 시작한 공연은 절대 예상으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미완성인 채로 아름다운 추상화
가장 큰 반전은 이승열의 무대였다. 이승열은 무대 앞에 쳐진 얇은 막 뒤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았다. 이승열은 숨고 이승열의 목소리만 악기가 되어 공연에 참가했다. 관객은 이승열이 기타를 메고 앞으로 뛰쳐나와 노래를 부를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승열은 공연 끝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디귿자로 만들어진 무대 앞 하얀 천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체들이 부유했고, 카입의 사운드 스케이프와 이승열의 목소리가 서로 부딪치더니 어떤 것은 비트가 되고 어떤 것은 선율이 되고 또 어떤 것은 티끌이 되었다. 한장의 추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음악은 선명한 멜로디를 드러내지 않고, 영상은 구체적인 형상을 보여주지 않았다. 영상과 소리와 음악이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되더니 괴생물체처럼 점점 부피를 키워나갔다.
가끔 어질어질할 정도로 현재와 현존을 알 수 없는 공연이었다.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엇, 여기가 어디지?’ 싶은 순간이 많았다. (그래, 여기는 진짜 어디일까?) 내가 런던의 시우르 로스 공연장에서 느꼈던 것도 바로 이런 기분이었다. 그때도 소리들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곤 했다. 땅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국경이란 의미없는 것이고 허공이야말로 우리의 고향이라고, 소리가 나에게 속삭이곤 했다. 나는 날아가다가 자꾸 땅을 내려다보았다. (이 공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스탠딩’이었다. 만약 앉아서 보았더라면 땅을 내려다볼 일이 적었을 것이다. 소리는 추상인데 내 몸은 ‘완전 리얼’인 거지.)
예술이 반드시 무엇인가를 비유하고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늘 현실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소리와 형체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미완성인 자체로 이미 완성된 것이다. 우리는 구체적이고 알기 쉬운 멜로디와 알아볼 수 있는 혹은 알아보기 쉬운 형체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그렇게 계속 살다보면 눈과 귀가 퇴화하고 말 것이다. 카입과 이승열의 공연은 보기 좋게 관객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나는 기분 좋게 얻어맞고 뻗었다. 허리도 아팠고, 정신도 혼미했다.
브이제이 파펑크가 기획한 <프레드페리 서브컬처 뷰직 세션 2012> 공연은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에 펼쳐지고 2012년 내내 계속된다. 또 어떤 방식으로 뒤통수를 후려칠지 기대된다. 함께 뒤통수를 맞고 싶은 사람은 www.viewzic.com으로 들어가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