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에 조카 은지원과 찍은 사진을 올린 박근혜, 2011년.
상상 못한 지각변동이 발생하고 있다. 왕조시대 유럽 왕을 위로하던 어릿광대를 승계한 오늘날 예능인이 격상된 지위로 킹메이커의 역할까지 수행하는 시대다. 한 시절 광대 재롱의 관전 권한은 권문세가의 독점이었지만, 공화정의 등장이 광대의 예능을 만인이 공유하도록 배분했으며, 시민으로 성장한 백성도 뒤통수에 준엄한 광배를 단 위정자에 주눅 드느니 연예인이 선사하는 감성적 위안과 농담을 선호하고 신뢰했다. 하지만 현대라고 사정이 크게 달라질 리 없다. 정치와 예능은 엄연히 다른 급으로 취급됐고, 서열도 달랐다. 그렇지만 이변이 일어나 고 있다. 킹메이커의 타고난 재능을 지닌 광대가 ‘스스로를 돕기’ 시작했다. 탄탄한 인지도와 연출된 캐릭터에서 영웅의 시뮬라크르를 착시하는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팬덤은 어느덧 정치적 지지층으로 둔갑했다. 급기야 스스로 왕좌에 오르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영화배우 로널드 레이건은 주지사를 거쳐 40대 미합중국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
<나는 꼼수다> 25회, 야당 얼굴마담 초청 관훈토론회에 출연한 문재인, <화성인 바이러스>에 출연한 강용석, 2012년.
예능 프로그램의 마력은 정치인을 에워싼 보이지 않는 보호막을 거둬내는 것이다. 보호막이 사라진 정치인은 국회나 당사에서 관찰된 정태적 초상과 달리 자지러진 폭소를 터트리거나 좌중을 사로잡는 썰렁한 농담을 던지기도 했으며, 두꺼운 피부 속에 가린 아픈 과거사도 털어놓았다. 단연 시청자(유권자)로부터 동정표가 쏟아졌다. 정치인, 예능인, 일반인 사이를 가르던 엄격한 범주화가 오류에 빠졌지만 모처럼 대중 눈높이로 하강한 정치인의 막장 연기는 시청자의 탄탄한 지지를 받았다. 마치 광대의 재롱에 흡족해하는 중세의 왕처럼.
오늘 주도권을 쥔 쪽은 정치가 아니라 예능이다. 앞뒤 재거나 철지난 위신 챙길 겨를이 없다. 방송에서 호출하면 마다않고 출연하는 게 먹고 들어가는 길. 예능의 본질은 (소비자이자 유권자인) 대중에게 한시적이고 강력한 감동 한방을 먹이는 건데, 정치인에겐 ‘짧고 굵은 인상’을 남겨야 하는 결정적 순간이 있다. 선거철이다. 대중 소구력이 높은 유명 정치인을 섭외하려는 방송 PD의 수요와 자기 PR 효과를 단시간에 극대화하려는 정치인의 욕망이 취향은 영 달라도 예능 방송을 매개로 악수를 나눈다. 비단 방송 출연을 통하지 않아도 친분있는 예능인과 함께한 기념사진은 정치적 지지도에 유의미한 변화를 초래한다. ‘유명한 A+유명한 B=우월한 C’로 등식화하는 게 대중의 속성.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한 문재인, 2012년, <황금어장-무릎팍도사>에 출연한 안철수, 2009년.
난해한 인문학이나 예술을 말랑말랑하게 풀어쓴 문장에 유명 필자의 얼굴을 겉표지로 포장한 대중교양서가 부실한 본문에도 불구하고 순진한 독자의 무고한 열광을 취득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예능 방송에 출연한 수더분한 정치인의 이미지로부터 베일에 가려진 실체를 확인했다고 안도한다. 예능 프로가 출연자에게 선사하는 가산점이 더러는 출연자의 진심에 대한 정당한 보답이지만, 더러는 출연자의 자기기만이 취득한 부당이득이기도 하다. 그 둘을 분별하기엔 시청자의 안목은 대체로 무지몽매하다. 언제나 잘 속고 잘 잊는 자, 그대 이름은 대중이어라.